[강성진의 증권반세기] 증권사 사장단 결의… '암덩어리' 제거

머니투데이 강성진  | 2014.04.04 10:31

[나의 일, 나의 인생](2) 깡통계좌 정리

편집자주 |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메가톤급 12·12대책에도 침체의 늪…성난 투심 연일 여의도·명동서 시위
YS·DJ까지 나서 정부 개입 촉구…부양책보다 깡통계좌가 급선무 판단
증권사 자율회의 강제반대매매 결의…코스콤서 자동 반대매매시스템 구축

1990년 10월10일 깡통계좌 정리를 단행키로 하자 이에 반대하는 투자자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증권시장 안정기금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무슨 정책이든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려면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 한다. 증안기금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행 즉시 그 파급이 나타날 수 없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성난 투자자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들은 매일같이 여의도 증권업협회와 명동 증권회관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 바람에 내가 영등포 경찰서장과 중부서장을 직접 찾아가 경비 강화를 부탁하기도 했다. 급기야 1990년 6월22일에는 명동에서 집회를 가진 150여명의 투자자들이 세 대의 버스를 나눠 타고 우리 집 앞에까지 몰려왔다.

나는 그때 증권업협회장으로서 증안기금 이사장도 겸하고 있었는데, 시위대는 내가 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주가를 끌어올리라고 요구했다. 최선을 다해 동분서주하며 고군분투하던 내 입장으로서는 좀 허탈한 심정이었다. 마침 시위대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기에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얘기를 직접 들어봤다. 그리고 솔직하게 내 의도를 설명하고 설득했더니 이 투자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식시장은 기본적으로 실물경기가 좋아지고 기업 이익이 늘어나면 자연히 오르게 돼 있다. 증안기금이 무리하게 주식을 사들인다고 해서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증안기금은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급격한 주가 하락으로 인해 시장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일종의 지지선을 만든 것이었다.

때로는 주식시장을 안정화하려는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주가를 더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동안 팔지 못해서 안달하던 사람들이 이때다 하고 매물을 내놓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에 많이 올랐던 급등주는 이런 시기에 매물이 집중 출회돼 급락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 무렵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주식시장은 1989년 4월1일 종합주가지수가 사상 최고치인 1007.77을 기록한 뒤 하락세로 접어들어 정부의 메가톤급 증시 대책이었던 12·12조치와 증안기금의 시장 개입에도 불구하고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990년 9월17일에는 종합주가지수가 566.27을 기록해 1년반 사이 거의 반토막이 났고, 그러다보니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것이다.

정치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와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가 1990년 8월24일과 30일 잇달아 증권거래소를 방문해 연일 폭락세를 보이는 주식시장에 정부가 강력히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숱한 시행착오에서 배운 것처럼 섣부른 시장 개입은 오히려 부작용만 남긴다.

1990년 8월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오른쪽)와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가 증권거래소를 잇따라 방문했다.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나는 정부에 증시 부양책보다는 이른바 깡통계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아무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던 미수금 및 미상환 융자금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것인데, 깡통계좌로 인한 악성 대기매물을 정리하지 못하면 증시 안정은 요원할 뿐만 아니라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증권업계가 나서야 했다. 협회에서는 세부적인 깡통계좌 정리 절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8일 증권사 사장단 회의를 열어 담보비율이 100%에 미달하는 계좌에 대해 10월8일까지 한 달 간의 유예기간을 준 뒤 10월10일 오전 동시호가 때 강제적인 반대매매를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증안기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증권업계의 자율적인 결정이었다.

여기서 잠깐 깡통계좌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증권회사는 신용공여 업무 규정에 따라 고객이 원할 경우 계좌에 있는 주식을 담보로 주식 매입 결제 대금을 융자해준다. 이때 담보로 잡은 주식의 평가액은 융자금의 130%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담보 주식의 평가액이 130%를 밑돌면 담보부족 계좌가 되고 100% 미만이 되면 깡통계좌, 그러니까 갖고 있는 주식을 다 팔아도 증권회사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계좌가 되는 것이다.

주가 하락으로 담보 주식의 시세가 급격히 떨어지면 깡통계좌는 크게 늘어난다. 증권회사에서는 담보부족 계좌가 발생하는 즉시 반대매매를 해야 하는데, 이 시기에는 주가 하락 속도가 워낙 빨라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깡통계좌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다보니 주가가 조금만 오르면 깡통계좌 정리 물량이 쏟아져 다시 시장이 가라앉는 악순환이 이어졌던 것이다. 깡통계좌는 이 무렵 증시 회복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강제적인 반대매매를 거부하는 투자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몇몇 증권회사 영업점은 시위대가 점거해 주문조차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에서는 깡통계좌 정리를 연기하자는 반대론까지 제기했지만 예정대로 강제 반대매매를 단행했다.

1989년 11월 주가 하락에 항의하는 투자자들이 증권시세 전광판을 소등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증안기금은 10월10일 새벽 4시부터 25개 증권사로부터 통보받은 879만주, 986억원 상당의 주식을 전량 인수했다. 다행인 것은 이날 반대매매 물량이 한 달 전의 깡통계좌 집계액 4500억원보다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인데, 다수 투자자들이 담보부족 금액을 채워 넣은 덕분이었다.

지금도 깡통계좌 문제에 대해 정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했던 12·12 조치가 깡통계좌를 양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정부의 증시 안정화 대책 가운데는 외상으로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한도를 크게 늘려준 것이 있었다. 주식을 매수할 때 증권회사에 내야 하는 위탁증거금 및 신용거래 보증금 전액을 대용증권으로 할 수 있도록 바꿔준 것이었다. 종전까지는 현금 20%와 대용증권 20%를 내야 했는데, 40% 전부를 대용증권으로 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 조치 때문에 주식을 외상으로 매수한 금액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대용증권 제도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단순히 대용증권의 한도를 늘려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차적으로 깡통계좌의 책임은 외상으로 주식을 산 투자자와 이를 부추긴 증권회사 직원들에게 있다.

깡통계좌 정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불가피한 조치였다. 깡통계좌는 하루빨리 도려내야 할 암덩어리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어쨌든 깡통계좌 정리 후 주식시장은 비로소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깡통계좌 정리로 얻은 큰 소득이 하나 있다. 자동 반대매매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사실 깡통계좌는 발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식 매입 자금을 융자받은 뒤 제날짜에 상환하지 않으면 그 즉시 반대매매를 하는 게 정상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산시스템의 미흡도 한몫을 했다. 미수금이나 미상환 융자금이 발생한 계좌를 증권회사에서 수작업으로 일일이 찾아내야 했던 것인데, 당시 깡통계좌 정리도 그랬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이준상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 사장을 만났다. 이준상 사장은 재무부 출신으로 투자신탁업계에서만 10년 넘게 일해 현장의 소소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증권회사 내부에 확실한 장치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 사장은 내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실무진에게 연구해보도록 지시했다. 협회도 시스템 구축에 최대한 협력했다. 그리고 반년도 지나지 않아 자동 반대매매가 가능한 전산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그렇게 해서 1991년 2월2일부터 이 시스템을 적용해 미수금이나 미상환 융자금이 발생한 계좌에 대해 자동 반대매매를 실시하게 됐다. 이때 역시 시행하기 전까지는 그런 식으로 반대매매를 하면 주가가 급락할지도 모른다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수금 및 미상환 융자금 발생 계좌가 이전보다 80%나 줄었고 주가에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자동 반대매매를 실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투자자들이 미수금과 미상환 융자금을 갚았던 것이다. 자동 반대매매 시스템은 이렇게 조기 정착할 수 있었다.

이때 자동 반대매매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제2, 제3의 깡통계좌 사태가 이어졌을지 모른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 온 뒤에 땅 굳는다고, 험한 시절을 잘 넘기면 그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시절을 맞게 된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깡통계좌 문제는 이제 먼 옛날 얘기가 돼버렸다. 이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3회는 '내 인생을 바꾼 한마디')

[강성진의 증권반세기-4] 증권가의 제왕, 시장 쥐락펴락
[강성진의 증권반세기-3] "여윳돈 놀리느니 증권 사라"
[강성진의 증권 반세기-1] 주가 30% 폭락, 잔인했던 '여의도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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