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우수상]어느 교수로부터의 편지

머니투데이 채종성  | 2014.01.01 05:30

[제9회 경제올림피아드]채종성·소설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 쪽이 심장에 더 가까우니까
- 지미 헨드릭스 -

"자네들은 돈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나?"
촘스교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강의실 안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 교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40년 간 수많은 저서를 내고, 그 숫자의 수 천배에 이르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업윤리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또한 '선한 기여를 하기위해' 라는 모토를 지닌 자신의 투자운용사를 설립해 7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실천하는 지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쏟아지는 존경을 표현하기에는 진부하고도 짧았다.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철학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먼 땅에 온 것이 아니었다.

"종호야 밑에서 사모래 늦게 쳐대니 위로 곤방 올라와도 제대로 쳐 낼 수가 있나. 공구리 하루이틀치나, 정신은 어디다 팔고 있는기고?"
일본용어와 뒤섞인 경상도 사투리가 막노동판의 매케한 먼지로 덮인 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나는 다시 체를 들고 흔들어댔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삽자루가 꽁꽁언 땅위에 내동댕이쳐진 채 칼같이 매서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MBA 첫 학기의 시작은 촘스교수의 특이한 헤어스타일만큼 낯설게 시작되었다. 오후 2시, 수업이 모두 끝났다. 다들 자유롭게 어디론가 흩어져 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갈 곳은 없었지만 목적지는 뚜렷했다. 돈을 벌러가는 것이었다. 미국의 물류창고는 그 넓이가 나를 압도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에, 수만평 넓이의 창고가 수십개가 지어져 있었다. 삽을 들던 내가 지게차 레버를 만지고 벽돌지게짐을 지는 대신 거중기 조종간을 쥐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노동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한 빌게이츠의 말은 자본주의의 진리를 내포한 모순이었다. 그의 말은 내 삶의 무게를 줄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밤이 되어 창고일이 끝나면 나는 다시 편의점으로 내달렸다. 최저임금 시간당 8불. 내 서른 한 살은 그렇게 연장해가는 하루의 무한반복이었다.

파트타임 동료들은 내이름 종호의 J자를 따 나를 제이라고 불렀다. 클래스메이트들은 잠이 부족해 늘 충혈된 내 눈을보고 레드아이라고 불렀고.

11월이 되자 사막지대라는 말이 지리학적오류가 아닌가 할만큼 애리조나주는 추워졌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자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침대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머리는 누군가가 망치로 계속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뼈마디 하나하나가 분리 되는 것처럼 아팠고 살갗은 따갑다 못해 자지러질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꺼칠한 얼굴에는 열꽃이 피어 있었다. 시험치는 날에 몸살이라니……
캠퍼스를 가로질러 강의실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처럼 새소리가 들렸지만 내 몸은 뒤로 걷고 있는것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세월을 견디는 사람의 힘만큼 위대한 돈버는 기술은 세상에 없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지.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도래한 것은 모두이런 인내가 필요한 제조업이라는 실체를 무시한 채, 금융공학이라는 미사여구로 장식된 허영체로 돈을 벌려고 했기 때문이지."

그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촘스 교수가 은퇴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이 미국이 공자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유명 교수로 그것도 현역으로 두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설사 현역으로 있더라도 나처럼 배고프고, 머리좋고, 성공에 목마른 한국의 젊은이를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도록 용납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대학에 개발도상국에서 온 유학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이 대학 MBA에 한국인은 나보다 몇 년 전에 딱 한사람 있었다고 들었다. 아마 그도 나처럼 주변인으로 살아갔으리라. 2003년의 애리조나 겨울은 추웠을 뿐만 아니라 삭막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아빠 이거 입으니 젊어 보인다. 아빠 늘 회사점퍼입고 있잖아. 그동안 사실 나, 너무 미안했어. 나도 이제 취직했으니 아빠 옷도 사주고 하려고."
민정이 민섭을 거울 앞에 떠밀다시피 세운 뒤 그에게 골프복풍이 나는 디자인의 재킷을 입히며 말했다.
"이 녀석아, 나 옷 같은 거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아무 옷이나 입으면 어때?"
주민섭이 대답했다.
"아빠가 그렇게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욕해. 아빠를 욕하는 게 아니라 자식들을 욕해. 그걸 원해? 아빠 딸이 사람들에게 욕먹고 다니는 거?"
민정이 입을 씰룩거렸다.
"허, 그러냐? 미안하다. 그래도 아빠가 이래뵈도 너 시집가고 나면 어디 외곽지에 가서 농사나 지으려고 땅 사두었다. 그러니 너는 나 옷살 돈 모아서 시집이나 가렴. 내가 늘 얘기했지. 나 너 시집갈 때 혼수품이나 마련해주고, 그냥 니 엄마 볕좋은 곳에 모셔놓고 나는 혼자 농사나 짓는다. 그러니 너도 니 앞가림은 니가 해야해."
"또 그 얘기야? 그리고 나머지 돈은 기부할 거라고? 걱정마, 아빠 돈 안바래. 나도 시집갈 돈 모으고 있거든. 이 색깔 예쁘다."
두 사람의 망중한을 깨 건 민섭의 점퍼 속 휴대폰 벨소리였다.
"회장님.회사로급히 와 주시면 합니다."
수화기 너머 정사장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또 회사가야 해?"
민정의 말에 주회장은 언제나 그랬듯 두관자놀이의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어린애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열살 이후로 그녀의 태양이었던 아빠. 오늘은 왠지 민정이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회장이 회사로 들어서자 정사장이 달려 나왔다.
"회의실로 가시죠. 긴급이사회를 소집해두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그의 말보다 더 다급함을 얼굴에 새겨 놓고 있었다. 주회장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모두 일어섰다. 회의장의 공기는 무거웠다. 주회장은 가슴 한켠이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착석하자 기획실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늘 제 주관으로 긴급회의를 주관한것은......"

나는 비서가 넘겨 준 최근 10 년 간 재무제표를 들여다 보았다.
회계는 사업의 언어라고 했던가. 제무재표는 이 회사가 얼마나 탐스럽게 무르익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업이익률, 현금흐름, 유동성자산, 비유동성자산,주가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하나의 유기체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지방에서 공업용 특수부품제조사로 출발해 30년만에 계열사 8개를 갖춘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2013년의 한국은 내게 확실한 성공의 디딤돌로 변해있었다.
조사한바에 따르면 이 회사는 회장이 아직도 현장에 살다시피하는 제조회사이다. 성실하고 좋은 회사다. 이런 좋은 회사들은 공통적으로 한가지 흠을 가지고 있다. 촌스러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토머스 프리드먼이 옳았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선한 사람이다. 그는 올리브나무가 렉서스를 맞이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단지 올리브나무들이 렉서스가 돌아다니는 바깥세상에 한시라도 빨리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싶다. 내가 십 년 전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충격을 한국사람들도 얼른 겪고 이 새로운 물결에 적응하기를 바란다. 아니 빈다.
11년 전 내가 미국에 나왔을 때 29살의 나를 보고 공부하기에는 나이가 많다고 했었다.
이제 40살의 나를 두고 성공한 것 치고 나이가 젊다고 한다. 세상은 이리도 변덕이 심하다.

"그래서 지금 요지가 뭐야?"
수많은 차트와 그래프가 장식된 프로젝터빔이 꺼지자 주회장이 기흭실장에게 재촉성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저희회사 주식이 아무 요인이나 특이사항이 없는데 주가가 급격히 뛰고 있습니다."
"이유가 뭔데?"
"아직 정확한 원인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거 참. 아니 그럼 무슨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거야. 뭐야?"
주회장이 조급하게 맞받았다.
"저희가 분석한 바로는 작전세력이 주가를 조작하는것 같은데 이렇게 주식으로 장난치면 다음번에는 저희주식의 신용도가 떨어져서 주가가 하락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획실장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변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이사들이 회의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 뭐 잘 해결 되겠지. 언제는 안 그랬나?"
누군가가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들 틈에 휩쓸려 나오면서 장이사는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매출량으로만 따지면 순위권에 들어오는 회사지만 체계로는 중소기업이라고 봐야했다. 하드웨어가 주력인 회사의 소프트웨어는 생각보다 단순하기 마련이다. 제일베어링의 핵심인력은 대개 회사와 함께 성장을 해와기술자 출신이었다. 자기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머리속에는 전략, 기획, 분석에 대한 개념이 들어갈 공간이 부족했다.

김성도씨는 잔업이 막 끝난 상태였다. 주변사람들에게 먼저 간다는 인사를 하고 공장문을 나섰다. 회사문을 나서자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새로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서른 여덟, 한 인간으로서는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생산직으로 다시 출발하는 사회인으로서는 많은 나이였다. 그 직장은 두 아이의 아빠로서는 힘이 나게 만들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힘이 날 일은 아니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형님, 뭐 하세요? 퇴근 하신다구요? 그럼 술 한잔해요."
장이사는 연탄 꼼장어집안으로 들어서자 매케한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성도는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주병은 벌써 반쯤 비어 있었다. 그가 앉자 성도는 인사보다 먼저 술잔을 건넸다.
"할만 하니?"
그의 잔을 받아들며 장이사가 물었다.
"네."
성도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심히 해. 이제 시작해도 안늦다"
"네."
고개 숙인 채 술잔만 기울이던 그는 술잔이 몇잔 더 오가자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책상물림만 하던 그가 현장에서 일하는 느낌, 애들 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두 사람이 한 동네에 살던 옛날 이야기까지 오고 갔다.
"성도, 너, 우리 동네 자랑거리였잖아. 그 때 너 때문에 그 좁은 우리 군내에 애들이 얼마나 열등감느꼈는지 아냐? 나도 너 부러워했는지 아냐?"
장이사가 운을 뗐다.
"제가 생각해도 그 땐 잘 나갔죠. 좋은 대학의 4년 전장학생에, 군대는 카투사 출신이고, 미국국비유학도 갔다왔겠다. 직장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들어갔죠. 형님, 저 그 때 첫 연봉이 얼마였는지 아시죠?"
장이사는 안다는 듯 눈을 맞추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좋았죠. 주식에 손 대기 전까지는……학교 동기놈 하나가 젊은 나이에 최연소 지점장승진했다고. 이건 무조건 된다고. 저도 갓 승진하고 연봉도 갱신했겠다. 술마실 때 마다 우리는 골든 제네레이션이다. 우리는 황금기를 달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보이는 게 없었죠."
말을 하던 그가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다행이다. 술 기운이라도 빌어 옛날 자랑이라도 하는게 기죽어 지내는거 보다 낫다고 장이사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너도 우리회사 주식이나 사두지 그랬어.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막 뛴다. 호재가 없는데, 공시가 있던 것도 아닌데."
"시중에 물량이 이렇게 많고 가격도 낮은 거도 아닌데, 작전세력도 아닐테고."
성도가 맞받았다.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장이사가 술잔을 치켜 들며 잔을 쳤다.
두 사람은 적당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던 성도는 생각에 잠겼다. 왜? 주가가 올랐을까? 왜?
두어 정거장을 지나자 차 유리창에회사 점퍼차림의 자신이 비쳤다. 그의 호기심은 파도가 지나간 뒤 해변 모래사장위의 글씨처럼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지난 몇 년간 받았던 고통을 다시 연장해 갈 수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그의 아내와 아들이 달려나왔다.
그는 그들을 힘껏 안았다.

뉴욕의 아침은 커피와 담배로 시작된다.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회의다. 보통 회의는 사람들을 녹초로 만들지만 나를 활기차게 만든다. 내 아이디어를 공격하는 자들이 회의섞인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어김없이 그들을 물어뜯었다. 명쾌한 답변이라는 송곳니를 드러낸 채.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에 다름 아닌 질문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오늘 회의에서는 내 기획서가 인정받아 내게 총지휘를 맡기다시피한 이번인수 건에 대해 왜 좀 더 과감하게 추진하지 않냐는 요지의 질문이 나왔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속전속결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헤지펀드업계 사람들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나는 한국인이라 한국의 정서를 아주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난이 겁나 주저하는게 아닙니다. 단지 이번 건을 성공했을 때 우리가 전면에 부각되면 다음번에는 그들의 정서상 외국인인 우리를 경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건은 성공할지 모르지만 다음 건은 매우 힘든 싸움을 해야할겁니다.그것을 피하려면 우리는 유령처럼 물밑에서 조용히 천천히 작업을 해야합니다. 서서히 고삐를 조으다가 상대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저항의 의지가 없을 때 나는 킬러 본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들의 눈에 느리게 보이는 것은 더 오래 우리 회사의 성공을 보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답변이 끝날 무렵 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겨드랑이에서도 땀방울이 팔의 뒤쪽으로 흘러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의 땀을 닦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차렷자세로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말을 마치고 의자에 앉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나는 이미 내 성공을 보장받고 있었다.

"민지야, 우리 다음 달쯤 여행갈까? 나 어제 합격 발표났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서 서프라이즈를 말하고 있었다. 햇볕이 그의 얼굴에 비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델의 노래소리와 뒤섞여 그녀의 귓속으로 녹아 들어왔다.
"믿어줘서 고마워."
그가 또 다시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었다. 따스한 햇살이 넓은 창을 통해 마주앉은 두 연인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확실히 노동일은 아침을 활기차게 열게 해주는 장점이 있었다. 찬공기가 코끝을 시리게 하자 성도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 좋은 아침."
작업반장이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손을 들며 인사하자 김성도는 고개숙여 인사를 건넸다. 군대나 회사나 아랫사람을 만나는 윗사람은 한마디라도 더 섞으려 하는 법이다.
그는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짜리몽땅하고 배가 나온 사내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성도는 웃음이 터지려 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성도가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맨날 똑같지. 어제도 술을 너무 마셔서. 어이구 지겹다, 이놈의 회사. 주식이나 사 놓을 걸 그랬지. 그 때 우리사주 받은거도 다 팔아먹었으니."
그의 말에 성도는 웃음이 났다.
"아까우세요?"
"아깝다마다인가, 요즘 우리 회사 주식이 날아가요. 오르는게 아니라 난다고."
반장은 벗겨진 머리위로 한손을 들고 비행기가 나는 시늉을 했다.
"저는 주식으로 쪽박찬 인생이라 그쪽 보고는 오줌도 안눕니다."
"그런가? 이거 괜히 미안해지네 나는 아직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아하하하…"

며칠전부터 증권투자카페와 커뮤니티에는 제일베어링에 대한 뒤숭숭한 소문이 돌기시작했다.
그 소문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에 전달자의 생각이 덧 보태져 확실한 것으로 재탄생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저희 회사는 사모펀드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 2차 회의에서 장이사가 발언을 하자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모펀드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시오."
누군가가 말을 했다
장이사는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일반적인 펀드와는 달리 개인돈을 모아 움직이기 때문에 사모펀드라고 불립니다. 법적인 제약으로 부터 자유로와 기업사냥꾼들이 자주 사용합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기업사냥꾼들의 공격을 받아 325곳이 상장폐지되고 피해액만 40조에 이릅니다. 이들은 은행권의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움직임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액수의 개인자금을 모아 공격할 회사의 이사를 선임할 만큼의 의결권주식을 사들인 뒤 그들을 조종해 상장폐지 후 다시 대표를 선임해 비싼 가격에 회사를 분할 매각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어제와는 다른 선명한 그림이 나오자 사람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끝내자 누군가가 요청했다.
"거 좀 더 긍정적인 의견을 내 봐요. 사실여부 보다 중요한 게 우리의 대처방법 아니오?"
금형기사출신이었던 홍이사였다.
"이번 상황은 우리들이 예상했던 단순한 작전세력의 개입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작전세력은 개미를 농락해 시세 차익을 노리지만 기업 사냥꾼들은 회사자체를 먹잇감으로 노린다는 면에서 저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드리기 힘듭니다."
"그건 대기업에나 해당하는 얘기 아니오?"
홍이사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짙게 배어 나왔다.
"여태까지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대적 M&A에 대한 대비가 전무했었습니다. 통상 이들은 전체 의결권을 가진 주식의 5퍼센트정도를 가지고 작전을 시작하는데 우리 회사의 대주주이신 회장님께서 모든 이들의 회사를 표방하신 삼년 전, 우리회사에 대한 회장님의 지분율을 2퍼센트까지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힘든 씨움을 하게 될것 같습니다."
"지금 회장님의 선의를 무시하는 거요?"
"사실만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장이사는 홍이사를 노려 보았다.
회의장은 이내 침묵에 휩싸였다.
주회장이 침묵을 깼다.
"막을 방법이 없소?"
"이 자들은 비상식적일 정도로 비싼 가격에 주식을 사기 때문에 주식보유자들이 그들에게 주식을 안 팔 이유가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 다른 회사와 서로 협력을 맺어 서로의 주식을 보유해 경영권을 방어해 주는 방식이 있긴 한데 현재 저희와 그런 협정을 맺은 회사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저희는 지금 거대한 적이 몰려오지만 연합해 싸울 같은 편이 없는 형국입니다."
주회장은 회사앞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제 시장의 사람들은 우리코너스톤에게 주식을 넘기거나 의결권에서 우리의 편을 들겠다는 밀약을 맺어가고 있었다. 한국은 기업사냥에 있어서는 개념도 잘 성립되지 않았다. 우리같은 사자에게는 먹잇감들이 지천으로 뛰어다니는 세렝게티같은 곳이다 내게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나는 요즘 웃음이 나온다. 막노동판을 전전해가며 대학교를10년 만에 마친 내가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이제 내가 가장 잘 아는 한국땅에서 기업사냥을 하고 있다. 이 나라는 대기업도 경영권방어에 취약한 곳이다. 하물며 중견기업이랴....
어쩌면 신은 내게 오늘을 주려고 나를 한국에서 태어나게 한지도 모르겠다.
이번 제일베어링 인수만 잘 되면 나도 M&A회사를 만들 것이다.
누구도 나를 무시못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아니 되어야 한다. 모든 일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그게 자본주의 아닌가?

"아빠, 요즘 뭐 힘든 일 있어?"
명선이 숟가락을 뜨다 말고 툭 던졌다.
"아니다. 힘든 건 무슨."
"다 표시나. 내가 아빠 한 두번 보나."
그녀가 코끝을 귀엽게 찡그렸다.
"민지야, 민지는 아빠 딸이어서 좋았니?"
"당연하지."
"민지가 아빠 회사에서 일했음 아빠는 어떤 윗사람 이었을거 같애?"
"눈치없는 사람. 윗사람이 현장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자고 하다시피하니 얼마나 밑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겠어? 하지만 아빠로서는 만점이지. 그래서 딸로서는 너무 행복했고 아빠로는 존경해."
잠시 후 그는 마당으로 나갔다. 별이 밝았다.
"이 만큼 지낼 수 있던것도 감사한 일이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식에 대한 루머는 사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침 출근길에 점심식사시간에 퇴근길에 야근에도 회사 주식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루머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파급효과는 현실로 다가 오기 시작했다.


이번주에만 영업3팀 2명, 재무팀 1명, 무역2팀 2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말이 들렸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남아있는 사람들도 특별한 애사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혹은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자신이 없어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임원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가면 길이 열린다는 신념을 믿고 살아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들을 지탱시키는 건 어떻게 되겠지하는 요행수에 지금까지 그래도 잘 되어왔다는 반복된 경험이 가져다 준 기존시스템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사라는 직함이 없다면 그틀의 충성심은 현장 일꾼들의 어리석어보이는 우직함보다 나은 점은 없었다.

햇살 가득한 공원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가득했다.
"여보, 요즘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성도의 아내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슨 소문?"
"회사가 위험하다면서요?"
성도는 가슴이 철렁내려앉는것을 느꼈다.
"누가 그래?"
"며칠전 김장 도우러 갔더니사택에 같이 있는 직원들 부인들이 그러더라."
"에이 참, 아니야 괜찮아."
하지만 성도의 말에도 아내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만약이라도 회사가 넘어가면 우린 어떡해요? 이제 겨우 빚 좀 갚아가나 싶었는데."
"아니래도."
성도는 입안이 마르는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차갑게 그의 얼굴을스쳐 지나갔다.

"오빠, 혹시 주변에 주식에 대해 좀 아는 사람없어?"
민지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괜한 걱정인지도 몰랐다. 아빠가 특별히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민지는 얼른 다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빠, 우리 아빠 언제 만나러 갈래?"


나는 포르쉐에 올라탔다.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주변에는 다른 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액셀레이터 페달을 꾸욱 밟았다.
부웅
경쾌하면서도 진동이 느껴지는 엔진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3천불짜리 수트, 4백만불짜리 집, 백만불짜리 차. 성공은 이런 것이었다.
도시 뒤편 언덕에 올라서자 도시가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석양에 물든 도시의 실루엣이 두 눈을 채웠다. 정상에 올라선자만이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전화를 해 이 성공을 같이 나눌 가족이 없다는 것이 허전했다.
이번 건만 성공하면 나도 연인을 만들어야 겠다.

"모든 인력을 풀가동해 주주들을 접촉해 코너스톤에게 주식을 팔지 말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재무팀에서는 긴급예산을 편성해서 주주들에게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우리가 주식을 매입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십시오. 설득 작업은 우리 주식담당자가 필요한 인원이 몇 명이든 인원을 차출할 수 있게 각 계열사의 협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건데 임원분들은 사재를 동원해서 가족,친지 분들에게 우리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시도록 권유해주십시오."
"그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장이사의 발언에 최연장자 최 이사가 제동을 걸었다. 장이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겁니다. 가족이나 친지분들께 돈을 빌려주는 형태로 해서 매입하시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회사가 사라져도 여러분들의 재산은 그대로 이겠지만, 우리회사식구들은 길거리에 내다앉아야 합니다."
최이사는 장이사를 쏘아보았다.
주회장이 입을 열었다.
"장이사 말이 맞아요. 나는 장이사에게 모든 걸 일임했소."
"회장님, 주식회사는 회의에 의해 결정된 사안으로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최이사의 눈이 검은 뿔테 안경너머로 번쩍였다. 그의 말은 엄연히 맞는 말이었다.
"최장한 이사, 우리 회사에 자네 라인의 영업부장이 그저께 그만 둔 것에 대한 화풀이를 어디다 하는거지?"
주회장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최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주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30년간 피땀 흘려 이 회사를 일궜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한번도 무언가를 강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회사가 풍전등화같이 위험한 이 시기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여러분들을 보며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맨 주먹으로 우리가 30년전 제일베어링을 일굴 때를 생각해보시오. 누가 우리보고 가능하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다시 한번만 손잡고 이겨 나갑시다. 잘 해 낼 수 있습니다."

나는 총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수천억원의 돈을 들여 장내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주주들을 만나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금융게임에서 요는 누가 더 많은 돈을 푸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리나 가치투자를 외치던 이들도 물밑으로 금전적 보상이나 이면계약으로 감투자리를 약속받자 더 적극적으로 배신의 깃발을 들고 선봉에 나섰다. 이들이 무너지자 개미들은 그들을 따라 속절없이 흘러갔다.
물론 가끔은 방어자들의 극렬한 저항이 따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일로 밥을 먹고사는 우리를 이기기에는 그들은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파상공세는 우리도 통제하기 힘들만큼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여러분....."
장이사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제 연기금을 운용하는 펀드가 판 우리의 주식을 저들이 매입했다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주식보유비율이 우리쪽을 앞질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주회장은 눈을 감았다.
"그 동안 우리회사와 함께 동고동락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주회장이 일어섰다.
"지난 30 년간 저희 제일베어링은 혁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외국수입에 전량의존하던 베어링의 국산화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더 가볍고 더 내구성있는제품을 시장에 내어 놓아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시장이 이렇게 되어 우리회사가 원치않는 방향으로 매각이 분해되어 매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두의 회사를 만들기 위해 제 주식비율을 최소화한 것에 대해 어떤 분들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었다고 비난하시는 분들이 계신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제 결정에 후회하지 않습니다.다만 급변하는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장인정신만을 강조해서 마치 백여년전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이 위기를 맞이한 듯한 위기를 우리 회사에 초래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주회장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제일 베어링이라는 회사는 아마 시장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식구들 특히 현장직원들이 받게 될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저들에게 고용승계를 주장할 것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지난 30년간 부족한 저와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주회장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몇 몇 이사들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나고 주회장은 걸어나와 차에 올라탔다
"1공장으로 가지."
운전기사는 시 외곽지의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자네 이야기 들었어?"
"뭐요?"
성도는 기계를 잠시 중지시키고 반장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우리회사가 팔릴지도 모른다네."
성도는 말문이 막혔다. 애들과 아내의 얼굴이 먼저 떠 올랐다. 그가 오랜 방황끝에 찾은 희망이 손가락사이로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민지야, 나 할 이야기가 있어."
"오빠, 무슨 이야기?"
그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민지야, 앉아. 나 아버지 만나러 못 갈 거 같아. 사실 나 해외지사로 발령이 났어."
"그런 이야기 전혀 없었잖아. 우리 결혼은?"
"사실 너한테 미안해서 말 못했는데 내가 자원했어. 나도 언제까지 한국에서만 썩을 수는 없잖아."
민지는 오빠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가는 눈썹, 오똑하지만 가는 콧대, 굳게 다물었지만 얇은 입술. TV 특강에서 관상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민지는 그가 낯설었다. 이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변함없이 자리에 앉아서 똑 같은 커피를시켜놓고 몇 년을 만난 사람이랑 대화하는 데 왜 모든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여보? 왠 일이야? 이 시간에 전화도 다 하고."
그녀는 청소기를 껐다.
"응, 오늘 밖에서 저녁먹을까?"
"정말? 당신이 왠 일이야?"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아내와 대로에서 마주서자 장이사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썼다.
시외곽의 골목길에는 카페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어머, 왠 일이야, 여보 이 카페가 아직 그대로 있어요. 22년이나 흘렀는데……"
아내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
"당신도 이제 흰 머리가 제법 보이네. 그래도 예뻐."
장이사는 머리에 손을 갖다대는 아내의 손을 움켜 쥐었다. 진심이었다. 아내는 장기현이 대학교 때 낙엽지던 러브로드에서 처음 본 때 만큼 이뻤다.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킨 뒤 장기현은 말을 건넸다
"여보,나도 이런 레스토랑이나 할까? 당신이랑."
"회사는?"
"나 곧 짤릴거야."
아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거좋지, 말 나온 김에 이 동네에 바로 차릴까? 걱정마 애들 등록금 같은 거. 애들 공부 잘해서 다들 장학금 받을건데 뭐. 유학은 보내지 말지. 우리 때 어디 유학 같은 게 있었나? 그래도 다들 잘만 살았잖아."
아내는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건배."
와인잔 사이로 아내의 미소가 반짝였다

차가 마포대교에 접어들자 주회장은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회장님."
19년간 그를 모셨던 기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밤중에 한강다리위에는 차들이 쌩쌩 지나갔다. 주회장은 차에서 내려섰다. 기사가 따라 내렸다. 주회장은 다리 난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사가 다가 오려하자 그는 손으로 그를 제지 했다.
"담배 한 대 피려는 걸세."
그는 다리 난간 사이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여보, 나 망했다. 당신 곁으로 갈까?"
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기사는 한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열 걸음정도 떨어져 서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레고블록의 마지막 한조각이 얹힌걸 확신한 순간 나는 내 방에서 승리의 표호를질렀다.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한 채 회사로 차를 몰고 갔다.
"하이, 미스터 손." 사람들이 인사와 더불어 축하를 건넸다.
나는 모두가 기다리는 회의실로 직행했다. 보스와 핵심멤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프로젝터빔을 쏘았다. 사람들이 스크린을 주시했다.
"제가 지난 여섯달에 걸쳐 추진한 프로젝트 이팅얼라이브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늘 부로 제일베어링은 저희 코너스톤이 1대 대주주가 됨과 동시에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고 상장폐지를 시킬 것입니다. 또한……"
잠깐 이건 뭔가 이상하다. 왜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 거지?
나는 기분나쁜 적막감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울러 저는 실무추진을 위해 한국으로 저희 코너스톤의 실무 담당자를 보내 법적인……"
아니, 표정들이왜 이렇지? 나는 육개월을 이 프로젝트를 껴안고 살았단 말이야.
당신들은 이 프로젝트의 성공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겨드랑이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스가 말을 조용히 입을 떼었다.
"미스터 손, 이 프로젝트는 중지하기로 했네."
잠깐 잘못 들은거겠지. 아니,그가 잘못 말한건가?
중지라니?
사무실 불빛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지. 내 모든 커리어를 무너뜨리는 말을 이작자는 왜 이리 쉽게 지껄이는 거지?
"미스터 손, 괜찮나? 자네 마음 이해는 가네만 일단 진정하고 앉게. 이따 내 방으로 좀 오게."
회의는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무거운 발검음으로 사장의 방에 들어섰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에드가 모리스씨가 투자금 철회를 요청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에드가 모리스씨가 그렇게 나오면 이 프로젝트는 콜오프 될 수 밖에 없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이런 일을 수 없이 겪어 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멍하니 서있자 그는 일어서서 내게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를 툭툭쳤다. 비틀대며 나의 방으로 돌아오자 비서가 내게 편지를 한 장 내밀었다.
"정말 중요한 편지랍니다."
나는 힘없이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아직도 친필 편지를 쓰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스터 손, 잘 지냈나? 나 마빈 촘스교수네.
기억나지? 기업윤리 강의하던.....
안 그래도 자네 소식 들었네. . M&A전문기업 코너스톤에서 일하고 있다고....
내게서 배운 학생이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에 기뻤네.
일년 전부터 자네회사가 제일베어링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었다지?
자네회사의 사모펀드에서 이번 프로젝트펀드에 가장 큰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자네도 알다시피 에드가 모리스씨네. 모리스씨는 이번 펀드의 3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네.
자네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잠시 모리스씨 이야기를 해주겠네. 이 분은 글로벌 보험회사를 가지고 있네. 다른 계열사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건 그 분의 사업의 핵심은 씽크로 인슈어런스 보험회사이네. 너무나 유명한 회사지.
갑자기 자네가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나는군.
돈은 선과 악의 개념이 없다. 선악의 개념이 없다는 것은 돈 그 자체는 가치라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돈은 외부변동 요소에 의해서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그 자체는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외부 요소가 없으면 돈은 매개체라는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고. 하지만 변화의 시대에 돈의 개념도 변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돈을 가용하는 기본철학의 변화범위는 무한대로 가능하다고 그래서 그 속에는 악함도 포용해야 한다고…..그 악함도 어쩌면 돈에게 매개체라는 가치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네의 이야기는 인상 깊었네
이젠 비밀도 아니겠지만 내가 블랙앤화이트라는 투자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여러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최근 일년간 씽크로사의 주식을 주로 매입했네. 아무래도 개인 투자회사 성격이 강하다보니 내가 어떤 회사를 매입하든 별 견제는 없더군. 그래서 주식을 매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네. 내 투자운용사는 내가 지난 40년 간 대학강단에 서면서 쌓아올린 철학을 실천한다는 데 의미가 있네.
즉, 내가 운용하는 주식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좋은 일에 사용한다는 명분이 필요했네. 원래는 나는 이 회사의 주식으로 차익을 남겨서 그 차익을 기부하거나 사회개선에 쓰려고 했었다네.
아, 참,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가 이수했던 MBA코스에 자네 이전에 한명의 한국인이 더 있었네. 미스터 김이라고. 풀네임은 김성도라고. 그 친구가 편지를 보내왔더군. 자신의 회사가 적대적 M&A를 당하고 있다고.
뭐, 나는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네. 우리가 한 일은 지난 일 년간 매입해오던 씽크로 인슈어런스의 주식을 한달간에 걸쳐 집중매입해 우리의 씽크로사에 대한 블랙앤 화이트사의 지분율을 23퍼센트까지 올린 것 뿐일세.
나의 블랙앤화이트사가 씽크로 인슈어런스의 대주주가 되었지.
자신의 회사가 넘어가게되자 에드가 모리스씨는 우리를 막기 위해 코너스톤에 출자한 자금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네. 따라서 자네 사모펀드의 프로젝트는 자동 중단 될걸세.
미스터 손, 내가 수업시간에 했던 말 기억나나?
제조업을 무시하지 말게. 오늘 날 인류의 발전은 전부이렇게 실물로 만든 물건들이 이끌어 왔네. 또한 세월을 견디는 사람의 힘만큼 확실한 돈 버는 방법은 없다네.
아마 지금 자네가 우리 블랙앤 화이트 사로 인해 입는 손실은 아직은 젊은 자네에게 큰 약이 되어줄 걸세. 진심으로 자네의 앞날에 행운을 비네.

Sincerely yours Marvin Choms
201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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