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도호 작가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을 보았다. 내 그리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 반가웠다. 서 작가는 자신이 처음 미국에서 살았던 아파트 건물 안에 어릴 적 자란 성북동 한옥집을 넣었다. 파란색 속이 비치는 천으로 마치 꿈속의 모습처럼 미국과 한국을 담아냈다. 작품은 어느새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내가 나고 자란 한국, 그리고 미국에서 겪은 질풍노도의 시기, 한국을 그리워하며 사색에 빠졌던 그 때. 그 아련한 기억. 투명한 천을 통해 포개지는 그 시절의 기억들, 그리고 이내 겹쳐지는 그리움.
작가는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란 제목을 통해 자신이 자란 어릴 적 집을 품고 있는 미국의 아파트, 그것을 품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또 그것을 품고 있는 서울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의 집으로 집결된다.
집. 집이란 단어는 그 사물자체로서가 아니라 의식 속에서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워하는 집은 건축물 그 자체가 아니다. 서 작가의 투명하고 공중에 떠 있는 집처럼, 한곳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하늘하늘 움직이는 것이다. 땅이 아닌 가슴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집은 그래서 '마음의 안식처'의 다른 말이 된다.
참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던 내게 집이란 여러 기억의 조합이다. 어릴 적 마당이 넓었던 우리 집, 숲 속에 쌓여있던 미국의 하숙집, 처음 혼자 살았던 천장이 높은 아파트, 바다가 보이던 보스톤 근교의 고층 아파트, 햇살이 따스히 비치던 플로리다의 시골 집. "사는 공간은 바뀌지만 살았던 공간에 대한 기억은 거미줄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것 같다"는 서도호 작가의 말처럼 집은 우리의 기억 안에서 혼재하며 존재한다.
'하우스푸어, 전세대란, 부동산 투자가치, 재개발, 담보대출···' 안타깝게도 요즘 '집'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내면에 소중히 추억되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은 어느새 소유해야 하고 가치가 창출되어져야 하는, 삶의 쉼터가 아닌 목적이 되어버렸다. '집 밖의 집 밖의 집 밖의 집'.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 '집'이란 단어가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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