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는 16살이었고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예쁜 댕기 고르느라 아랫마을을 어슬렁거린 게 화근이었다. 일본인 인간사냥꾼들에게 납치됐다. 같은 동네 살던 13살 옥분이는 이제 막 가슴이 올라와서 젖멍울이 많이 아팠다. 그 옥분이도 순이 언니와 있다가 함께 끌려갔다.
두 소녀는 그렇게 강제로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 그들은 원래 소녀였으나 일본군은 '조센삐(조선창녀)'라 불렀다. 일본군의 만행과 전쟁의 모진 고초 속에 옥분이는 죽었다. 그 옥분이를 기억하는 순이는 기어코 살아남았다. 아들도 낳았다. 그 아들은 다시 딸을 낳았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순이는 살아있으면서도 스스로 역사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순이가 나이 들어 죽으면서 그녀는 책 속의 죽은 역사가 됐다. 그 '순이'를 우리 옆에 다시 살리려는 연극 한 편이 나왔다.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서울시극단의 올 하반기 정기공연 '봉선화'다.
이 연극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던 아픈 역사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오래 전 할배 할매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할매가 겪었던 무지막지한 고통이 무대 위에 펼쳐지면서 보는 이도 함께 아프게 된다. 무거운 감동이 남기에 커튼콜에 도저히 박수를 칠 수가 없다. 열연한 배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연극은 1982년작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바탕으로 하는데, 원작자인 윤정모 작가가 직접 극본을 썼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위안부로 끌려간 여인 순이와 그녀의 아들 배문하, 외손녀 배수나까지 3대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낸다. 소설가 윤정모는 일본군의 강제 위안부 만행을 언급한 첫 여성 작가다. 일제의 만행을 처음 밝힌 역사가 고 임종국 선생의 당부대로 강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이 연극 역시 그런 취지의 작업이다.
일본의 극우 아베 정권은 지금도 반성하지 않고 망언을 쏟아낸다. 우리 소녀들을 전장으로 내몬 인사들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 상류층으로 떵떵거리고, 국사편찬위원장과 일부 교과서가 일제 병탄기를 미화하는 판국이다. 이러니 그들이 우리나라를 우습게 볼 수밖에. 일제 옹호 인사들을 이 연극의 객석에 앉혀 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니다. 누굴 탓하겠나. 우리 대부분이 강제 위안부를 역사 속의 사건 정도로만 여긴 채 잊고 살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지내다간 훗날 또 언제 우리 딸들이 모진 능욕을 당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섬뜩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봐야 하는 이유다.
예술감독 김혜련. 연출 구태환. 출연 이창직 강신구 김신기 최나라 이재희 나자명 정연심 등. 다음달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만~3만원. (02)399-1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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