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칼럼]연구윤리와 평가윤리

머니투데이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 2013.10.30 10:14
지금은 한 은행 회장으로 변신한 전직 교수와의 일화다. 10년 전쯤인 어느 날 전화가 왔다. 필자가 연구회에서 발표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신문컬럼에서 인용하고 싶은데 컬럼이라 논문에서처럼 인용할 방법이 없으니 사전에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인상적인 학자적 윤리의 모습이다.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의 경우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해서 채택되면 편집진이 모든 문장을 표절과 인용 차원에서 철저히 점검한다. 모든 법률학술지의 편집진이 하는 일이 바로 그 작업이다. 바르게, 정확히 인용되었는지를 본다. 외국어 자료도 원자료를 찾거나 필자에게 연락해서 그 언어를 쓰는 편집자가 체크하고 도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자료는 각주에 ‘이 자료는 우리 편집실에 비치되어 있음’이라고 붙인다. 독자가 연락해서 받아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요즘은 한 술 더 떠서 학술지들이 이해상충이 없는지 서면 진술서를 받고 필요하면 논문의 서두에 밝힌다. 예를 들면 금융개혁법에 비판적인 논문의 저자가 투자은행 일을 하는 변호사라면 그 사실을 밝히게 하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식이다. 이 방식은 교수들의 모든 활동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투자은행의 사외이사 경력이나 특정 프로젝트 수행실적이 있으면 학교에 서면으로 밝히고 웹사이트에 내용을 공지한다. 그러면 그 교수의 금융법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그 사실을 감안하게 된다.

한편 표절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윤리가 논란거리인 반면 정작 논문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 실적을 심사, 평가하는 측의 윤리는 큰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평가인 성적표, 생활기록부, 대학에서의 학점, 논문심사 같은 것에서 시작해서 평생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의 평가를 받는데 평가가 공정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경우에 대한 엄중함은 좀 부족하다. 학술지 논문 심사에서도 심사윤리에 관한 각서 같은 것을 쓰기는 하는데 과연 잘못된 평가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평가란 전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제3자가 잘못을 말하기도 어렵다. 가장 말이 많은 국제 음악콩쿠르나 올림픽 체조경기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평가윤리 문제는 비단 학교나 논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선 중진의원도 정당의 공천심사에서는 노심초사다. 고위공직자 후보는 인사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평가를 받는 셈이다. 공공기관은 평가 결과에 따라 임직원 대우마저 달라진다. 모든 조직에는 승진과 진급 심사가 있다. 공무원의 근무성적 평정표, 청와대의 고위공직자 인사자료 같은 것은 한 번 작성되면 오랜 동안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고칠 기회도 없다. 그래서 학연, 지연 동원해서 잠재적 평가자에 대한 이른바 ‘관리’와 줄서기가 부단히 이루어지는 데,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가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나쁜 평가 시스템은 사회와 조직의 건강에도 해롭다. 우리는 나쁜 평가를 받으면 자신의 허물보다는 평가자의 의도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경쟁상대가 있는 평가에서는 평가자와 그 상대의 관계를 문제 삼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일부 은행 인사에서 ‘출신’이 평가에 작용한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평가자와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자란다. 자신과 조직이 불행해 진다.

요즘 각 대학에서는 연구윤리 관련 제도를 속속 개선하면서 허위제보에 대한 대책도 같이 마련하는 추세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전반에서 평가윤리 수준의 제고와 위반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위원회 기능과 문서주의를 대폭 강화하고 익명성과 기밀주의를 다소 완화하는 것이 좋겠다. 익명주의는 조사능력이 있는 피평가자만 유리하게 하고 책임회피 수단만 된다. 평가자의 양식과 양심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에만 맡겨두기 어렵다. 연구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식과 양심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앞에서는 종종 위력을 발휘하지만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관행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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