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심오함으로 기억되는 그의 작품과 명함에 그려진 코믹함은 언뜻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챘는지 그는 최근 작품을 보여주었다. 극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먼, 단 세 개의 선으로 만들어진 웃는 얼굴이었다. 왜 갑자기 화풍을 바꿨냐는 질문에 그는 시력의 저하로 잘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그는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고통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고 했다. 두 눈과 꼬리가 올라간 입. 그는 이후 수없이 많은 웃는 얼굴을 그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많은 얼굴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세상에 똑같이 웃는 얼굴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각기 살아온 길이 다르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다르듯 똑같이 웃는 얼굴은 분명 없다. 한 사람의 웃음은 그의 인생을 담고 있을 테니. 제각기 다른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단 세 개의 선이 담고 있는 것처럼, 스마일을 그린 이목을 화백의 작품에서 그의 인생이 보이는듯했다.
그의 화풍은 분명 달라졌다. 섬세했던 작업은 극히 단순화 되었다. 나무와의 관계를 통해 정교한 사물을 그렸고 이를 통해 삶을 표현했던 그는, 이제 단 세 개의 선으로 웃는 얼굴을 그린다. 하지만 '결국' 거기에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채워진 것과 비워진 것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던 그는 여전히 '스마일'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날 밤 난 생각에 잠겼다. 낮과 밤, 기쁨과 슬픔, 인생과 죽음이 그러하듯 채움이 없으면 비움이 없고, 비움이 없으면 채움이 없다. 채울수록 비워지고 비울수록 채워지는 비움과 채움, 그것은 어쩌면 반의어가 아닌 동의어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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