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은 어떻게 무속인에 홀렸나?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 2013.09.30 07:02

[이슈 인사이트] '확증 편향', '선택 지원 편향'···사회적 지위 높을수록 위험


"내가 뭐에 홀렸던 것 같다. 나 스스로도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회삿돈 횡령 혐의로 구속 수감된 최태원 SK 회장이 27일 선고된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한 말이다. 최 회장은 항소심에서 원심의 진술을 뒤집고, 펀드 조성과 계열사 선지급에 관여했다고 자백하면서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원심과 같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최 회장이 사기를 당했다고 지목한 인물은 증권가 출신의 '무속인' 김원홍(52) 전 SK해운 고문. 최 회장은 이미 김 전 고문을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주변의 증언 등을 들어봐도 최 회장이 김 전 고문에게 적잖게 휘둘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를 전적으로 믿었던 최 회장이 김 전 고문의 요구에 따라 회삿돈을 동원해 450억원을 김 전 고문에게 보냈고, 결국 이 돈을 떼인 것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다.

최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SK그룹 내에서 이른바 '도사님' 또는 '묻지마 회장님' 등으로 불렸던 김 전 고문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증권사 영업사원으로 출발했다. 이후 여의도 증권가에서 유명한 무속인으로 변신, 신기에 가까운 예측력을 보이며 유명세를 탔다.

2000년 무렵 손길승 전 SK 회장이 최 회장에게 김 전 고문을 소개했고, 그는 상속세 문제로 고민하던 최 회장의 현금재산을 수백억원에서 단숨에 1000억원대로 불려줬다. 이후 최 회장은 김 전 고문에게 완전히 빠졌고, 투자금으로 수천억원을 건넸다.

의아한 것은 재계 서열 3위 그룹의 총수가 어떻게 일개 무속인에게 수천억원을 맡길 정도로 맹목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심지어 김 전 고문이 선물 투자로 수천억원을 날린 2008년 이후에도 최 회장은 1000억여원을 더 보냈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최 회장은 김 전 고문에 대해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선택 지원 편향'(Choice supportive bias) 등에 빠졌을 공산이 크다.


'확증 편향'은 자신이 기존에 믿고 있던 것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와 반대되는 정보는 피하려고 노력하는 심리학적 오류를 뜻한다. 새누리당 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지지정당이 잘못한 경우에도 애써 외면하며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바꾸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확증 편향'의 사례다.

김 전 고문에 대한 최 회장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김 전 고문이 수천억원을 잃었을 때에도 최 회장은 시장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김 전 고문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선택 지원 편향'은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려 애쓰는 것을 말한다. 스마트폰 가운데 삼성전자의 '갤럭시S'와 애플의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현재 쓰는 스마트폰에 만족하는 것도 '선택 지원 편향'에 따른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최 회장처럼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기 싫어해 이 같은 오류에 빠질 위험이 높다. 최 회장 입장에서는 자신이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SK해운 고문이라는 자리까지 준 인물이 한낱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터다. 최 회장이 1심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기 전까지 김 전 고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최 회장이 김 전 고문에게 속아 사기를 당했음을 입증하더라도 회삿돈에 손을 댄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일개 무속인에 휘둘려 오너 형제 동시구속이라는 '비극'에까지 몰린 재계 서열 3위 그룹의 모습이 씁쓸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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