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교육 오늘의 역사] 2003년 오늘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사망

머니투데이 MT교육 정도원 기자 | 2013.08.16 08:30
1975년 유엔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이디 아민 당시 우간다 대통령.
2003년 오늘(8월 16일)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망명지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제다에서 사망했다.

◆식민지군의 중위에서 신생 독립국 군대의 대령, 다시 대통령으로

이디 아민은 1946년 영국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지금의 케냐·우간다·탄자니아)의 식민지 군대에 입대해 1962년 우간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에는 중위가 되어 있었다. 독립국 우간다도 그들만의 군대를 구성해야 했으므로 군 경력이 있는 이디 아민은 곧 신생 우간다군의 대령으로 진급했다.

우간다 왕국의 에드워드 무테사 2세는 친영·친서방 정책을 폈으나 1966년 국무총리 밀턴 오보테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은 영국으로 망명하고 우간다는 공화국이 되었다. 이 쿠데타에 오보테의 편을 들어 가담한 이디 아민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오보테는 그간의 정책을 바꾸어 친소·친동방 정책을 폈으므로 종래의 종주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1971년 1월 싱가포르에서 영연방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디 아민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를 축출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오보테는 인접 국가인 탄자니아로 망명했다.

◆'아프리카의 히틀러'라는 별명 얻어… 그 자신은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몰아낸 지도자' 자칭

이디 아민은 오보테를 축출한 직후 외교 정책을 다시 뒤집어 친미·친서방 정책으로 바꾸었으므로 그의 쿠데타는 처음에는 서방 제국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반대파의 존재 자체를 일체 용인하지 않는 가혹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특히 이웃 국가인 탄자니아에서 호시탐탐 권좌 복귀를 노리고 있는 밀턴 오보테의 지지자에 대한 고문과 테러로 우간다 국민 30여 만명이 학살당했다. 500년 이상 인도양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과 경제 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인도인을 일제히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는 서방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아프리카의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닉슨, 포드로부터 정권 탈환을 모색하던 미국 민주당이 '인권'을 외교의 최고 가치로 상정하자 이디 아민과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워졌다. 이디 아민과 그의 우간다 정권은 연일 미국 의회의 외교위원회에서 맹비난당했다.

그러자 이디 아민도 외교 정책을 급변, 반미·반서방의 자세를 취하고 소련, 리비아에 접근했다.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몰아낸 지도자'라는 수식어도 이 때부터 스스로 칭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통일기구 정상회의에서 온갖 상징적 퍼포먼스 펼쳐

이디 아민이 자신의 독재 정치와 변덕스러운 외교 정책을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포장하자, 유유상종인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1975년 그를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의장으로 추대했다. 1975년 7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아프리카 통일기구 정상회의가 열리자 이디 아민은 백인 사업가 4명이 짊어진 가마를 타고 그들이 치켜든 양산을 머리 위에 드리운 채 등장했다. 우간다 내의 그들의 사업권을 몰수하겠다는 위협으로 자신의 가마를 들고 양산을 받쳐들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인 노예가 흑인 지도자의 가마를 받쳐든다'는 그의 상징적 퍼포먼스는 정상회의장 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신이 난 이디 아민은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고 있어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공동의 적이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폭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역시 하나의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이디 아민은 빅토리아 호반의 한 섬에 '케이프타운'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을 세워두고 우간다 공군으로 하여금 이를 폭격하게끔 기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폭탄은 섬에 하나도 명중하지 못했다.

정상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이디 아민은 분노해 공군참모총장을 호출한 뒤 그를 입간판에 묶어두고 재차 폭격을 명령했다. 공군 조종사들은 만약 이번에도 명중시키지 못하면 다음에는 그들이 섬에 묶일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뒤였다. 이번에는 폭탄이 '케이프타운'에 명중했다.

◆탄자니아 침공하다 자멸

이디 아민이 계속되는 기행으로 민심과 군심을 잃자,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의 오보테 망명 정권에 합류하는 세력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더 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이디 아민은 1978년 10월 탄자니아에 선전포고하고 침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과대망상의 독재자가 제 무덤을 파는 격이 되고 말았다.

선제 기습 공격으로 국경 근처의 접경 지역을 점령하고 8000여 명의 우간다 난민을 학살하는 등 전범 행위를 강요받은 우간다군의 사기는 매우 낮았으며 이디 아민의 통솔력이나 지휘력도 매우 미흡했다. 1979년 1월 전황은 반전되어 탄자니아군은 잃었던 영토를 모두 수복하고 되레 국경을 넘어 우간다로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이디 아민은 리비아에 SOS를 쳤으며,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이에 호응해 3000여 명의 병력을 파병했으나, 탄자니아군은 엔테베 공군기지에 이들 리비아군을 포위한 채 고립시키고 우간다군을 각개격파해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디 아민은 철수하는 리비아군의 수송기를 얻어타고 간신히 리비아로 탈출한 뒤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일찍이 이디 아민은 반미·반서방으로 외교 정책을 바꾸었을 때 이스라엘을 '미국의 속국이자 괴뢰 앞잡이'라고 맹비난하며 "이스라엘은 불법 점령하고 있는 골란 고원을 아랍 제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대통령궁 뒷쪽의 언덕에 '골란 고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우간다군으로 하여금 이를 점령하여 아랍 제국에 반환케 하는 상징적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재임 중 그의 이러한 반이스라엘 행태를 높이 평가한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은 관대하게 이디 아민의 망명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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