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대 오른 실명제, "동창회 총무=차명거래자?"

머니투데이 박종진 기자 | 2013.08.05 05:51

실명제 실시 20주년, 의원발의 '봇물'…"차명거래 전면금지, 모든 국민 '잠재적 범죄자'"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1항에 의거해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합니다" (1993년8월12일 오전 7시 긴급 국무회의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표문 첫머리)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한지 20년을 맞았다. 이후 자금세탁방지와 차명거래 처벌 등을 위한 관련법들도 제·개정을 거치며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20년 만에 수술대에 오르고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각종 비리범죄 근절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금융실명제의 변화를 요구했다.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법안을 내놓으며 '차명거래 금지'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예상치 못한 큰 혼란을 경계한다. 모든 국민의 금융거래를 대상으로 하는 금융실명법에서 차명거래를 금지하거나 차명계약을 무효화시킬 경우 대다수 무고한 사람들이 잠재적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4일 정치권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김기준 의원을 비롯해 올 4월 조정식, 지난달 초 민병두, 이종걸 의원(이상 민주당) 등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번 주에는 국회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박민식 의원(새누리당)도 금융실명법 개정안을 내놓는다. 안철수 의원(무소속)도 본인의 제1호 법안으로 차명계좌 처벌방안 등을 담은 금융실명제 관련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12일 열릴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 여야 공동 토론회에서도 금융실명제 개정문제를 중점 논의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금융실명법 개정에 방점을 찍은 셈이다. 핵심은 차명거래를 금지(김기준·조정식 의원)해 실거래자와 명의대여자를 처벌하고, 차명계약 자체를 무효화(민병두·이종걸 의원)시켜 계좌에 들어온 돈을 명의대여자 소유로 간주한 후 30%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 등이다.

드러나지 않는 '검은 거래'를 차단해 투명성을 높이자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금융권 안팎에서는 금융실명법 개정을 방법론으로 삼을 경우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현재 우리나라는 차명거래가 불법이 아니다. 금융실명법상 금융회사는 실명확인 의무만 있고 돈의 주인을 따질 필요는 없다. 즉 신분증과 대조해 계좌 주인이 맞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실제 누구 돈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아야할 의무도 없다.


대신 탈세나 각종 범죄를 위한 차명거래는 '특정금융거래보고법'(FIU법),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조세범처벌법', '상속세 및 증여세법' 등을 통해 처벌하는 구조다. 일반적 금융거래 전반에 대해서는 실명확인만 거치도록 하고 차명거래 자체를 징벌하는 건 범죄행위에 따른 개별법의 규제를 따르는 방식이다.

각 개별 법에서 구체적 처벌 조항도 수차례 보완을 거쳐 모두 마련됐다. 예컨대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금융실명법에 따라 실명 확인된 계좌에 보유하고 있는 재산은 명의자가 그 재산을 증여받은 것으로 추정해 증여세를 부과한다.

만약 금융실명제법 개정으로 차명거래가 전면 금지된다면 원칙적으로 범죄 연루와 상관없이 차명거래 자체가 처벌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선의의 차명거래' 문제다.

금융권 관계자는 "동문회, 부녀회, 곗돈 등 각종 친목모임 회비 관리에서부터 가족 간의 일상적 거래와 자녀명의 통장 등이 사실 다 차명거래"라며 "대다수 국민들이 범법자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상적 거래가 힘든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를 위해 지인들이 명의를 빌려주는 경우도 차명거래다. 정치자금, 부조금 등 각종 자금모금 거래에서도 중간에 다른 사람 계좌를 거치면 이 역시 차명거래에 걸린다.

법 개정을 주장하는 쪽에선 예외를 두면 된다는 입장이다. 박민식 의원은 "현행 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촘촘히 규제를 마련하자는 것"이라며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외를 두겠다"고 말했다. 김기준 의원도 "실명법의 본래 취지를 살리자는 것"이라며 "선의의 차명거래는 상식선에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법을 적용할 때 일일이 선의의 차명거래 여부를 규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한 전직 관료는 "극소수의 범죄자 때문에 모든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며 "수많은 금융거래 유형을 하나하나 분류하는 건 불가능한 만큼 실명법이 아닌 행위에 따른 개별법의 규제를 보다 더 강화하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의 경우도 차명거래를 전면금지하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다만 테러 방지 등을 위해 금융회사의 고객확인의무 등을 강화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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