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번호 ‘3124’ 피고인 전두환, 그의 ‘배짱’ 혹은 ‘객기’

머니투데이 이승형 사회부장 | 2013.07.18 06:25

[광화문]

1996년 2월 26일 오전 10시20분쯤 서울지법 17호 법정. 푸른색 죄수복을 입고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표정에선 긴장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승형 사회부장
이날은 수인번호 ‘3124’의 피고인 전두환이 비자금 은닉 등의 혐의로 첫 공판을 받던 날이었다.

“현재 쓰고 남은 소유 재산이 얼마입니까?”
김성호 당시 부장검사가 묻자 전 전 대통령이 거침없이 말했다.
“현재 재산은 검찰에 모두 제출돼 있으며 검찰에서 워낙 수사를 야무지게 해 그 외 남은 재산은 없네요.”

검찰의 수사능력을 비아냥거리는 듯한 농담에 방청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검찰은 당시 전 전 대통령의 계좌 100여개를 뒤져 본 후였다.

이듬해 12월 22일 오전 10시50분쯤 전 전 대통령은 안양교도소 앞 공터에 검은 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구속 수감 2년만에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게 된 그의 얼굴에는 시종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교도소 생활이 어땠냐”고 기자들이 묻자 그가 답했다.
“여러분들은 절대 가지 마시오. 교도소란 게 갈 데가 못돼. 허허.”
반성의 말을 기대했던 수십여명의 기자들은 씁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전 전 대통령의 ‘배짱’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엊그제 집으로 들이닥친 검찰 압수수색팀에게 “수고가 많다. 잘 둘러보시라”며 여유 있게 말했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점심 무렵이 되자 “시장해서 난 밥 먹으러 가니, 찬찬히들 둘러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 특유의 화법, 그러니까 강박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도 애써 여유를 부리는 말투와 뻔뻔함을 느낄 만큼 상대방을 당황케 하는 농담. 그 심리의 기저에는 “넌 나에게 안돼”라는 우월적인 호기로움이 깔려 있다.


그의 언행을 두고 혹자들은 ‘배짱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객기를 부린다’고 정정해야 옳다.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5·18 특별법 제정과 함께 검찰 수사가 압박해오자 연희동 집앞에서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자신의 수하들을 뒤에 거느린 채 검은 코트와 흰색 머플러 차림으로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식으로 말했다. 홍콩 느와르 무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 유명한 ‘보스 정치’의 역사적 사례다.

그는 또 교도소에 수감되자 ‘5공화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28일간 단식투쟁을 하는 ‘투사’로 변모하기도 했다. 보스와 투사라는 이미지는 양립되기 어렵지만 그는 해냈다.

전문의에게 보다 정밀한 정신 분석을 의뢰해야 할 테지만 아마도 전 전 대통령에게 이 세상의 현실은 ‘농담’처럼 보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재판장 앞에서, 기자들 앞에서, 압수수색팀 앞에서, 그리고 국민들 앞에서 그런 객기가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다.

비로소 수십 년만에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 검찰은 앞으로 전 전 대통령의 아들들을 불러 조사할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재산 형성이나 탈세, 재산 국외 도피 등의 혐의가 발견되면 전 전 대통령 본인에 대한 수사도 불가피하다.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을 주도했던 박범계 민주당 의원의 지적대로 때에 따라서는 전 전 대통령 내외와 아들, 며느리가 대질 심문을 받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농담’이 아닌 실현 가능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과연 “통장 잔액 29만원밖에 없다”고 또다시 국민을 상대로 겁 없는 농담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제 객기는 그만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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