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힘이 세다"

머니투데이 김영권 작은경제연구소 소장 | 2013.05.18 10:52

[웰빙에세이] 꽃에게 배우는 생명의 힘

사진=이동훈 기자
꽃은 약하다. 꺾으면 꺾인다. 뽑으면 뽑힌다. 밟으면 밟힌다.
산길에 핀 꽃이 너무 아름다워 마당으로 옮겨 심는다.
꽃은 뿌리가 뽑히는 순간 깜짝 놀란다.

그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나는 꽃에게 사과한다. 양해를 구한다.
그대여 나와 같이 가자. 나와 인연을 맺자.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싶다.

뿌리가 뽑힌 꽃은 금세 기운이 빠진다. 내 눈길을 사로잡던 생생함이 사라진다. 미안하구나. 고개 숙인 꽃이여!

나는 그 꽃을 마당에 심는다. 뿌리를 편안하게 땅에 누이고 같이 가져온 흙으로 감싸준다. 두툼하게 묻어 꾹꾹 눌러준 다음 물을 준다. 꽃은 며칠 동안 심한 몸살을 앓는다. 잎은 시들하고 꽃대는 구부정하다. 처음 어미를 떠나 낯선 집에 온 강아지 같다. 어떤 꽃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는 죽었나 보다. 그러나 어떤 꽃은 다시 고개를 든다. 그가 꽃대를 세우고 조심스레 꽃잎을 연 날.

아! 이 꽃은 약하지 않구나. 이 꽃은 뿌리가 뽑히는 아픔을 넘어 다시 향기를 머금었구나.

이제 이 꽃은 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싱싱하게 다시 피어난다.

하지만 야생에서 피고 지는 형제 꽃보다 아무래도 몸집이 작다. 기세가 약하다.

남달리 허약한 꽃은 얼른 꽃씨를 맺는다. 이번 생 대신 다음 생을 기약하는 생명의 씨앗을 서둘러 퍼트린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북극의 빙하가 줄줄이 녹아 내렸다. 갈수록 더 빨리, 더 많이, 더 무섭게! 이 여파로 북반구의 겨울은 오히려 더 추워졌다. 모든 꽃이 다 사라진 지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뚫고 다시 찾아든 봄. 우리 집 마당에도 봄이 가득하다.

땅이 녹고 부풀더니, 마른 가지에 물이 돌고 새 잎이 돋더니 산과 들에 초록이 오른다. 앞산에 연둣빛이 도는가 싶었는데 열흘도 안 돼 온통 푸르다. 산하는 봄꽃의 경연장이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벚꽃 진달래를 지나 조팝나무꽃 복사꽃 사과꽃 배꽃 앵두꽃 박태기꽃 메이플꽃 명자꽃이 앞 다퉈 만개했다. 철쭉, 라일락, 할미꽃, 양지꽃, 금낭화, 제비꽃, 수선화, 민들레, 개별꽃, 피나물꽃, 꽃잔디꽃, 돌단풍꽃, 꽃다지, 냉이꽃, 봄맞이꽃, 봄까치꽃……. 아는 꽃을 다 읊어도 모르는 꽃이 훨씬 많다.

조금 있으면 찔레꽃과 장미꽃이 피고 아카시아꽃과 밤나무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일 것이다.

우리 마당에도 꽃이 피었다. 할미꽃이 피었고, 금낭화가 피었다. 하늘매발톱과 둥글레꽃도 피었다. 나리, 비비추, 붓꽃은 쑥쑥 줄기를 올리고 있다. 지난해 산에서 옮겨 심을 때는 잘 살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한겨울 맹추위 때는 다 얼어 죽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하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힘차게 생명을 피워내고 있다. 지금 보니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1년 새 더 깊이, 더 넓게 뿌리를 내렸다.

모종을 사서 심은 꽃잔디는 주변으로 열 배는 번진 것 같다. 그들은 얼음장 밑에서도 바빴나 보다. 울타리에 둘러 심은 쥐똥나무도 한 살 더 먹은 티가 난다. 키는 크고, 줄기는 굵고, 뿌리는 실하다. 그 역시 쉬지 않고 움직였으리라.

덕분에 마당에는 생명이 충만하다.


4월초 심은 잔디는 쑥쑥 자라고 있다. 잔디떼 1100장을 3300장으로 삼등분해서 심느라 며칠을 고생했다. 그 많은 조각 잔디들이 자라면서 뿜어내는 생명의 기운이 어찌 가열차지 않겠나.

올해 심은 배롱나무 회화나무 명자나무 라일락 모과나무 매실나무 등도 다들 싱싱해졌다. 남천이란 나무만 유독 몸살이 심하다. 모양새가 마음에 쏙 들어 두 그루 사다 심었는데 원래 달려 있던 잎까지 다 떨구고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메마른 가지를 만져 보는 심정이 아슬아슬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푸른 생가지가 몇 가닥 보인다. 마른 가지 옆으로 돋아난 새 생명. 그것에서 풋풋한 생기가 전해진다. 생명은 역시 힘이 세다.

나와 인연을 맺은 이 꽃과 이 나무. 나는 그들의 사연을 안다.

나는 그들에게서 생명의 힘을 배운다. 꽃은 약하지 않다. 꽃은 강하다. 꽃은 끈질기다. 꽃은 영원하다. 그러나 이들뿐이랴. 천지의 꽃과 나무는 다들 제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한시도 쉬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생명을 지키고 가꾸고 피워낸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꽃과 나무들이 이러저런 사연을 안고 이런저런 곳에서 끝없는 생명의 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내가 발을 디딘 이 자리, 이 땅에도 흙과 씨앗이 반반씩 섞여 생명으로 꿈틀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저기서 무시로 싹이 트고 줄기가 오르고 꽃이 피겠나. 돌틈, 바위틈, 보도블록틈, 아스팔트틈에도 꽃씨는 숨어 있다.

꽃과 나무의 생명에서 동물의 생명이 생기고, 동물의 생명에서 인간의 생명이 생겼을 테니 꽃과 나무의 생명은 내 생명의 기원이다.

나는 꽃에서 나왔다. 꽃과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같은 생명의 기운들이다.

꽃과 나는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아버지 태양의 자식들이다.

꽃과 나는 같은 땅에 자리 잡고 같이 사는 어머니 대지의 형제들이다.

우리는 주파수만 맞추면 언제든 하늘과 땅에서 비롯된 생명의 기운을 주고받고 나눌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그럴 수 있다.

오늘 마당의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꽃에게 인사한다.

그대여, 나와 인연을 맺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대여 고맙다.

나는 그대와 주파수를 맞추고 싶다. 그대처럼 예민하고, 아름답고, 생생하고, 강인한 생명의 대역에 주파수를 맞추고 싶다. 그대와 더불어 내 생명의 기운을 일깨우고 싶다. 갑갑한 삶에 갇혀 시들해진 나를 푸르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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