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현 금감원장의 휴대폰 번호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 2013.05.09 14:33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의 명함엔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다.
핸드폰 번호 적혀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은 세상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 '갑(甲)의 자격'에는 몇 가지가 있다. 명함에 휴대폰 번호를 적지 않을 수 있으면 분명한 갑이다. 최원장은 "어차피 알려면 다 알 수 있는건데, 수고라도 덜어줘야죠"라고 말했다. 실제로 휴대폰 번호 명함에 적혀 있다고 해서 '기나 고둥이나' 다 전화할 리는 없다. 그리고, 아무도 걸어 주지 않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서러워할 때가 곧 닥친다. (그러니 높은데 계신 분들도 어지간하면 명함에 휴대폰 번호 적어 두시길 권한다)

최원장의 명함에 적힌 이메일 주소도 thankyoumuch@fss.or.kr 즉, '대단히 감사합니다'이다. 두달전 최원장이 금감원 수장이 됐을 때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잖았지만, 최원장의 명함은 그가 쌓아온 내공을 짐작케 한다.

그의 명함은 을(乙) 노릇 하면서 체득한 연륜의 산물이다. 2009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전문위원으로 파견 나가 있을 때 최원장은 국회의원들을 '모시고' 다닐 일이 많았다. 지금이야 비서도 있고 휘하에 직원들이 구름같지만, 국회 전문위원은 사실상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의 비서'나 마찬가지다. '의원님'들의 현장 방문 같은 행사를 조율하려면 수십통의 전화를 돌리고 부탁을 해야 했다. 일이 잘 안풀리는 것도 스트레스였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건 '리턴 콜(Return call)'조차 안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친정인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의 후배들조차도 그랬다.

'돌아가기만 해봐라, 리턴 콜 안 해주던 *들 다 죽었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최원장은 "막상 와서는 한 놈도 못 죽였어"라고 웃지만 리턴 콜 잘해주던 직원에게 정이 갈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최원장은 지금도 후배들에게 "출세하려면 리턴 콜 잘해줘라"고 충고한다.

금융감독원장에 오른 사람이 느낀 갑의 설움이 이럴진대, 보통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을의 비애는 일러 무삼할까.
남양유업 영업직원의 막말 파문을 계기로 입 달린 사람이면 너나 없이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기자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갑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다들 을로서 느꼈던 비애를 쏟아내는 걸 보면 우리 사회의 '을 콤플렉스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우스개로 자주 쓰는 예이지만, 오죽하면 옷을 사도 'GAP' 브랜드만 산다는 사람까지 있을까(GAP이라고 쓰고 '갑'이라고 읽는다). '을 노릇'에 한이 맺혀 자식한테도 옷은 꼭 GAP만 사주면서 너는 꼭 '갑질'하고 살아야 한다고 비장하게 다짐을 받는다.

공정거래위원회까지 나서 조사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을 컴플렉스'가 좀 나아질지는 모르겠다. 하기야 공정위의 최대 임무가 '악질 갑질'을 잡아내는데 있고, 경제민주화도 결국은 '갑질 근절'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누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갑질 관리'가 개인과 조직의 최대 리스크 관리가 되고 있다. 잇따라 터져 나온 스캔들은 '갑질' 한번에 인생과 조직이 망가질 수 있다는거 하나는 확실히 보여줬다.

기업도 마찬가지. 표준근로계약서상에 고용주는 갑, 근로자는 을이다. '갑질' 잘못해서 을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을들이 잘해 줘야 갑도 사는 법이다. 갑의 운명이 을에 달려 있으니 따지고 보면 을이 갑이고 갑이 을이다(이참에 근로계약서도 갑과 을을 바꿔 써보면 어떨까).

은행원 출신으로 사업가의 길을 걸어온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나이 60이 다 돼 가는데, 돌이켜 보면 '내가 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때부터 인생이 꼬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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