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女' 공기업 취업, 매일 영문 리포트 보며…

머니투데이 이현수 기자 | 2013.04.26 07:30

[Beyond 혁신경제]<9-1> 한국무역보험공사 이연정씨

이연정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한국무역보험공사에 취직했다. 그는 "진짜 중요한 것은 대학 간판이 아닌 자신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사진=구혜정 기자

거대한 항만이 18세 여고생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형 크레인이 수출용 컨테이너를 다발로 묶어 연신 들어 올리고, 한쪽에선 자동차를 가득 실은 배가 출항에 나섰다. 수출항의 규모에 압도당했던 어린 학생은 이듬해 컨테이너들의 안전, 수출보험을 책임지는 컨트롤타워에서 실무 일을 하게 됐다. 한국무역보험공사의 고졸 사원 이연정씨(19)다.

이씨가 국내 수출 전초기지인 평택항을 둘러본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매년 가는 견학의 일환이었다. 국제통상과였던 이씨에게는 공부한 내용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실습의 장이었다.

"뉴스에서 수출입 보도를 할 때나 봤던 화면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죠. 교과서에서 접하는 무역은 막연한 이론이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화물들을 눈으로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아 내가 이런 것을 배우는구나. 뿌듯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이라고도 생각했죠."

◇내 길을 찾겠다
세대가 달라졌다. 이씨는 1994년생이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2010년, 마이스터고가 생겼고, 자율형사립고도 등장했다. 중학교에서 일반 인문계고등학교 진학하던 게 자연스러웠던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제가 고등학교 갈 때 전체적으로 변화가 있었어요. 특성화고등학교, 마이스터고, 자율형사립고나 특목고 등 선택의 폭이 많이 생겼습니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생각할 시간도 충분히 줬어요. 반 친구들 중 3분의 1이 일반고가 아닌 특성화고등학교로 갔어요."

이씨는 신광여중 재학 시절 전교 10위권대을 유지했던 우등생이었지만, 대학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대학에 가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대학 미술과를 가면 다 화가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커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대학도 성적 맞춰서 가야하고, 취업도 자기 소망과는 무관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먼저 사회경험을 쌓고 그 후에 대학에 들어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 '무역'에 생각이 집중됐다. 부모님이 수출입 관련 일을 한 영향으로, 막연하게나마 무역이나 금융업을 장래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인터넷을 뒤져서 국제통상학과가 있는 서울여상에 가기로 결정했다. 부모님도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며 지지해줬다.

◇자격증 20여개 '실력으로 승부'
이씨가 무역보험공사에 낸 입사 원서에 적힌 자격증이 22개다.
'대한상공회의소시행 무역영어 3급, 한국세무사회시행 전산회계 1급, 한국금융투자협회시행 증권투자상담사, 마이크로소프트오피스 세계경진대회 장려상….'
자격증과 수상경력으로만 이력서 한 장이 넘어간다.


이연정씨는 고등학교 3년동안 20개가 넘는 자격증을 땄다. 대학에도 진학할 예정이다. 이씨는 "단지 취직을 일찍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구혜정 기자
고등학교 3년 동안 20개가 넘는 자격증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자격증과 학교 교과과정이 연계됐기 때문이다. "회계나 컴퓨터 자격증 몇 개 정도는 고등학교 교과 과정 중에 충분히 배울 수 있어요. 학교 시험이 자격증 공부와 많이 연관돼있는 거죠. 국제통상학과 교과내용은 국제무역사 자격증을 따는 데 도움이 돼요."

학교는 동아리활동도 적극 지원했다. 이씨는 컴퓨터동아리에 들어가, 매일 밤 10시까지 컴퓨터 관련 자격증 시험을 공부했다. 국제대회도 동아리방에서 준비했다.

고등학교 생활 중 자격증을 따고, 수출입과 금융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은 것은 무역보험공사에 취직하는 데 강점이 됐다. 때마침 지난해부터 공기업의 고졸 채용이 확대됐다.
이씨는 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학년 250명 중 4명만 들어간 공기업에 당당히 취직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졸업생들도 삼성전자 등 대기업이나 은행, 증권사에 입사했다.

◇하루 영문 리포트만 20개
이씨는 고3 때 취직이 결정돼, 이달로 입사 6개월 차다. 그는 해외 바이어 신용도를 평가하는 기업조사팀에서 일하고 있다. 모든 보고서가 다 영문으로 씌어져 있다. 이씨가 하루에 넘겨보는 해외 리포트만 20개에 달한다.

"고등학교 때 무역영어를 배워둔 게 도움이 됐죠. 신용평가를 하다보니까 재무비율도 봐야하는데, 고등학교 회계교과에서 어느 정도 배운 내용이라 역시 도움이 됐습니다."

이씨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원이 되고 싶다. 1년 후엔 내 이름을 말하면 회사 사람들이 좋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원이 되고싶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도 준비하고 있다. "몇몇 수도권 대학에는 재직자 특별전형이 있어요. 3년 동안 산업체에서 근무하면 조건이 충족돼요. 대학을 안 가겠단 것이 아니고 단지 취직을 일찍 했을 뿐이니까요. 4년 뒤엔 정식 시험을 봐서 대졸자와 똑같아지고 싶습니다."

이씨의 중학 동창들 중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은 현재 대학에 갔거나 재수를 하고 있다. "저더러 부럽다고도 하죠. 저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캠퍼스 생활이 부러울 때가 있는데, 그 친구들이 제가 부러운 거나 마찬가지겠죠."

그는 "대학보다는, 자신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분야에서 자신이 경쟁력을 가지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 중학교때부터 대학에 꼭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대학이야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거니까요. 다른 또래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을 일찍 할 수 있다는 게 고졸사원들의 장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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