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국민연금·TV 시청료 안 내고 싶다"

머니투데이 박창욱 선임기자 | 2013.02.15 10:16

[영화는 멘토다]17. '남쪽으로 튀어'-자유로운 삶 위해 돈보다 필요한 것은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평소 통 안에서 거지처럼 살았다. 그런데도 학식과 명성이 전 그리스에 퍼지자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왔다.

정복자는 철학자에게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줄테니 말하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쿨(?)하게 답했다. "당신이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옆으로 좀 비켜주시오."

프랑스 철학자 장 프레포지에의 저서 '아나키즘의 역사'에선 아나키즘의 기원을 디오게네스가 속한 키니코스(견유) 학파에서 찾고 있다. 책에선 아나키즘을 극단적인 정치 이념으로서 '무정부주의' 정도로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된다고 했다. 아나키즘이란 모든 권위와 그로 인한 폐해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를 갈망하는 일종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의 책 '아나키즘 이야기'에도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다. 박 교수는 "지금 이 나라에는 국가주의가 너무 과도해 인간의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연이 과도하게 제한되고 파괴되고 있다"며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아나키즘이라는 생각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인간이 자신을 핍박하는 권위와 절대, 관념과 사상, 조직과 전체, 편견과 허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그들이 만드는 사회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낭만적인 '아나키스트'로 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쪽으로 튀어'(감독 임순례)는 아나키스트를 다룬 작품이다.

과거 우리나라 영화에서 흔하게 보였던 단점을 많이 벗어 던졌다. 어떤 주장을 담을 때 과도하게 진지하거나 심각해지는 경향 말이다.

비록 템포는 느리지만 분위기만큼은 유쾌하다. 이는 주인공 최해갑 역할을 맡은 김윤석의 호연 덕분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최해갑은 국민연금을 내라는 말에 "나 국민 안 해"라며 맞서고 시청료를 내라는 압력에 TV를 내던지며 버틴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며, 학교에 가선 교장에게 급식비를 횡령한 의혹을 따지고 든다.

하지만 다소 찌질하고 소극적이다. 말 뿐이다. 최해갑 자신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고향섬의 난개발을 시도하려는 국회의원을 막으려는 중졸 후배를 선동하는 과거 운동권 동료들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보인다.

최해갑은 후배 대신 고향섬에 내려가 살면서 비로소 행동주의자가 된다. 어설픈 지식인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꾸리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부당한 개발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진정한 아나키스트로 거듭난다.

하지만 이 영화, 아쉬운 점이 많다. 일본 원작 소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저항이 주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하며, 기존의 관습과 지혜로운 화해도 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을 실제 삶의 양식으로 제대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판타지 속에 그냥 방치해둔다.

그래서 차라리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부당한 권력에 힘없이 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부정을 그린 신파조의 '7번방의 선물'이 대신 극장가에서 흥행가도를 달리는지도 모르겠다.

2%쯤 부족한 드라마투르기로 인해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88년작 '허공에의 질주'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 영화엔 정작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도, 오히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다룬다. 특히 30대 이상 여성 팬들에게 강추한다. 리버 피닉스를 추억할 수 있다.


#. 그래도 영화 속 인물 최해갑만큼은 정말 부러웠다.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고 끝까지 함께 해주는 아내 안봉희가 있어서다. 사실 최해갑처럼 자유로운 삶은 경제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특히 배우자)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배우자를 포함해 함께 하는 친구를 많이 모으는 것이 인생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다.



*[영화는 멘토다]의 지난 기사 전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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