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주기 복지'에 열광···20년 집권에 중산층은 죽었다

머니투데이 아테네(그리스)=최종일 기자 | 2012.04.04 06:00

['유로존 극과 극' 그리스·독일을 가다②-2]정치후견주의의 참담한 현실은

↑ 아테네 시민들이 신문 가판다 옆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가판대 신문엔 전날 벌어진 긴축 반대 시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일 실려 있다. ⓒ사진=아테네 홍봉진 기자
그리스의 한 노신사가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을 방문해 아들의 취업을 청탁했다. 자신의 친인척 표를 합쳐 몇십 표는 얻도록 해주겠다고 큰 소리쳤다. 지역주민의 솔깃한 제안에 정치인은 2가지 옵션을 제시했다. 정부의 직업훈련원을 거치면 말단직 공무원으로 취업시켜주거나 임시기술직으로 곧바로 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부기관의 번듯한 자리를 원한 이 노신사는 "나는 직업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버럭 화를 냈다. 표를 주고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노신사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그리스에서 흔한 사례라고 윤강덕 코트라 그리스센터장은 말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리스 정치권의 '정치적 후견주의'는 상상을 초월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표를 줬다고?"…"그럼, 일단 채용해줘"

그리스 정치는 원칙보다는 이해에 따라 정책을 추구하는 포퓰리즘(populism)과 유권자의 지지를 대가로 뒤를 봐주는 '정치적 후견주의'(political clientelism)가 가장 큰 특징이다. 포퓰리즘은 1980년대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후견주의는 이 시기에 개별 정치인보다는 정당을 기반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특히 좌파 사회당과 우파 신민주당은 표를 얻기 위해 청탁용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경쟁적으로 늘렸다. 표 앞에 재정부담이나 행정의 효율을 논하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유권자들은 특혜를 대가로 표를 던졌고 일부 양심 있는 정치권의 지적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쳤다.

1981년 사회당 정부 시절부터 공공부문은 급속히 덩치가 커졌고 대부분 공직은 정당이 추천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크리스토스 라이린치스 아테네대학 교수는 "사회당은 정부 규모를 키웠을 뿐 아니라 대학, 병원, 연구소 등 새로운 공공기관도 만들었는데 경제적·기능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가 목적이었다"고 개탄했다.

좌파정부 하에서 그리스정부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공공부문의 생산성은 추락했다. 사회당은 국가 재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모든 공공부문에 지지자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민간기업들도 사업면허를 따내고 은행권 대출을 보장받기 위해 정당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포퓰리즘과 후견주의는 1990년대 초 정권이 우파인 신민당으로 잠시 바뀌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리스 마케도니아대학의 타키스 파파스 교수는 "1993년 사회당이 재집권했을 때 후견주의 원조인 사회당마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리스의 후견주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파파스 교수는 "우파와 좌파정부가 번갈아가며 대규모 직원을 고용함에 따라 그리스 공직사회는 특정 정당의 집권 시기마다 공직자들이 층층이 쌓이는 퇴적암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코트라의 윤 센터장은 "그리스에선 공무원시험을 치르지 않고 사람을 뽑다보니 각종 비리와 특혜시비가 따라붙고 공복(公僕)개념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30년 전 그리스로 이민해 한국 식당을 운영하는 유근길씨는 "정권을 잡기 위해 어느 정부든 산하기관에 낙하산 인사를 무더기로 했다"며 "관청에 가면 한 사람이 할 일을 5명이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파파스 교수에 따르면 사회당은 1994년 공무원 채용을 감독할 고용최고위원회(ASEP)를 독립기관으로 설립하고 불공정관행 근절에 나섰지만 편법이 난무하면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지금도 말단직에서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의 후견주의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 그리스는 4년여에 걸친 경제불황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아테네 도심 스타디우 거리에 있는 한 상점 앞에 한 그리스인이 아기를 안은 채 동냥을 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사회에 만연한 뇌물 관행…족벌정치 폐해도

그리스의 후견주의는 비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었고 공직사회의 부정부패 만연에도 일조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뒤 2009년 10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당시 총리는 그리스 공공부문에 '시스템적인 부정부패'가 만연한 점을 인정하며 공공지출을 줄이기 위해 부패척결에 나서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도 후견주의와 뇌물·부정부패로 매년 그리스는 GDP(국내총생산)의 8%를 갉아먹는다고 지적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2009년 그리스인들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거나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또 소득세를 허위로 신고하기 위해 평균 1355유로(약 203만원)의 뇌물를 제공한다고 전했다.

정치권의 난맥상은 족벌정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의 할아버지는 손자와 동명이인으로 총리를 지내며 파판드레우가의 정치왕조를 만들었다. 게오르기오스의 아들 안드레아스는 1980년대 무분별한 복지정책을 도입한 장본인이다. 아버지 안드레아스가 뿌린 '재앙의 씨앗'으로 인해 아들 게오르기오스는 결국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리스 보수정치권은 좌파인 파판드레우 가문과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았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총리를 지낸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는 2차례 총리를 지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조카다. 코스타스는 집권 후 수십억 유로 규모의 불법 부동산 투자와 퇴직연금 편취 의혹 등에 휩싸였다.

그러자 코스타스 측 인사들은 '수장'이 비리혐의로 물러나기 직전에 수만 개의 직책을 만들고 정당의 지인과 친인척을 앉혔다. 공무원의 해고 금지를 보장한 그리스헌법을 이용해 선수를 친 것이다.

아테네대의 라이린치스 교수는 "후견주의와 부패, 공공부문의 비효율성, 허약한 시민사회의 특성, 막대한 공공부채는 정당 활동과 연관이 깊다"고 지적한 뒤 "개혁을 추진해 국가부도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21세기의 첫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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