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다시 고졸 은행장을 기다리며

머니투데이 정진우 기자 | 2012.01.11 15:10
지난해 하반기 고졸 채용으로 A은행에 들어간 최가연(19세 B특성화고 졸업 예정, 가명) 양은 요즘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입행 3개월 만이다. 은행장이 되겠단 야심찬 포부를 안고 수 십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은행원이 됐지만, 갈수록 "이건 아니다"란 확신이 굳어지고 있다.

최 양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최 양을 비롯한 고졸 직원들은 입행 후 체계적인 교육 대신 영업 현장에 내몰렸다. 3주 교육 후 서울 모 지점에 배치된 최 양은 지점장으로부터 "신용카드 영업에 주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인맥이 없는 최 양은 친척과 학교 선생님들에게 카드 신청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영업 스트레스와 숨 막히는 기업 문화 탓에 최 양은 은행에 사표 낼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고졸 채용을 확대하는 은행이 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전산 교육이나 은행 업무 대신 '신용카드 영업' 등 극히 제한된 일만 시키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이 1057명의 고졸자를 채용했지만 최 양과 비슷한 이유로 퇴사했거나 퇴사를 고민하는 직원이 2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은행의 고졸 채용이 자발적이지 않아서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 압박에 마지못해 고졸 사원을 뽑아만 놓았지, 이들의 직무를 명확히 정해놓지 않은 탓이 크다. 특히 고졸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입사 교육도 거의 없고 대졸자와 업무상 차별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문제는 일반 기업도 마찬가지다. 각 기업이 수 십 명에서 많게는 수 백 명의 고졸 사원을 채용했지만, 관리 소홀로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에 나가는 사원이 많다. 고졸이란 이유로 무시당한 경험담도 적잖이 들린다.


고졸 채용이 화두로 떠오른 건 학력 인플레에 의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학벌보다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자는 시대정신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가방끈'이 짧다고 차별받고 '희망의 사다리'마저 걷어차이는 현실을 없애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고졸 채용이 자리 잡으려면 무엇보다 기업의 자발적 의지가 중요하다. 고졸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어떠한 차별적 요소도 없애야 한다.

지금은 은행장들이 대졸 출신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고 출신 은행장이 많았다. 이들이 대졸자를 제치고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개인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열린' 기업문화 때문이었다. 그만큼 기업의 노력이 중요하다. 다시 고졸 출신 은행장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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