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48)감독은 지난 해 12월30일 느닷없이 삼성에서 사실상 해고를 통보 받은 후 10개월 가까이 장외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다가 KIA 감독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KIA는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3년 재계약을 한 조범현(51)감독의 계약 기간이 1년 더 남아 있고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많았던 올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성공해 내년에도 조범현 감독 체제로 계속 갈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조범현 감독은 10월12일 SK와의 4차전에서 0-8로 완패해 탈락한 후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18일 팀을 떠나게 됐다.
그 배경을 놓고 팀 성적 부진, 감독의 리더십 등등 여러 분석과 해설이 나왔다. 물론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이면(裏面)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이 우리 재계의 특성을 잘 아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재계의 맞수 삼성-현대차, 그라운드서 맞붙는 황태자들
그런데 올시즌 삼성이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해 있는 상황에서 KIA가 SK에 무기력하게 패하자 현대기아차 그룹의 관점에서 KIA 선수단을 대표하는 감독이 조범현감독이라는 것이 대외 이미지상 약하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룹 고위층이 감독 교체를 결정했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KIA가 재계 라이벌 삼성 감독 출신인 선동열 감독을 그가 삼성에서 해고됐었다는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영입함으로써 프로야구에서 삼성-현대기아차 그룹의 새로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것이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대외적으로 구단주인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대신 실질적인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로 인정 받고 있는 이재용(43) 삼성전자 사장과 정의선 현대기아차그룹 부회장의 미묘한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이재용사장도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이다.
삼성이 전 해태 김응룡감독을 영입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2002년 직접 야구장에 나가 응원을 하고 김응룡 감독과 악수를 나누며 우승을 축하하며 야구단의 전면에 등장했다.
◆플레이오프서 만난 롯데-SK, 오너들의 격려전도 후끈
SK와 롯데가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격돌한 19일 인천 문학구장에는 SK그룹 최태원(51)회장과 롯데그룹 신동빈(56)회장이 모두 나와 팀을 응원하고 경기 후 덕아웃을 찾아 감독과 선수단을 격려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시리즈도 아닌 플레이오프임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구단주들이 동시에 구장을 찾았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어서 그룹 오너들이 야구단의 경쟁과 가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까지가 올시즌 페넌트레이스 4강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4개팀들의 움직임이다. 페넌트레이스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해 있는 삼성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KIA는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롯데는 신동빈 롯데회장, SK는 최태원 SK회장이 버티고 있다.
◆LG-두산, 오너들의 참을 수 없는 야구사랑
이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구단들의 팀 정비 과정을 살펴봐도 야구단 경영 경쟁이 기업 간의 전쟁 보다 더 치열한 것 같다.
구 부회장은 형 구본무 구단주 시절인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패한 후 LG가 단 1차례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치욕을 풀기 위해 올시즌 용병 및 트레이드를 통한 선수 확보에 엄청난 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화와 함께 공동 6위로 처지고 말아 빛이 바랬다. LG는 삼성과의 페넌트레이스 경기 마지막날인 10월6일 곧 바로 박종훈 감독(52)을 자진사퇴 형식으로 경질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7일 김기태 수석코치(42)를 신임 감독으로 발탁했다.
LG트위스 구단주는 구 부회장이 지난 8월 초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물러나면서 신용삼 LG경영개발원 사장이 대행을 맡고 있다. 업계에선 LG전자 사령탑을 맡아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는 구 부회장이 여전히 LG트윈스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번 감독 교체도 그의 의중이 어느 정도 반영됐을 것이란 추측이다.
두산의 구단주는 야구단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두산건설 박정원(49) 회장이다. 박정원 회장 역시 올시즌 우승을 목표로 ‘두산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특히 용병 영입을 중심으로 전력 강화에 투자를 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에 팀이 무너져 감독 대행 체제가 됐고 포스트시즌 탈락이 사실상 확정되자 8월초 구단 사장까지 내부 승격으로 교체했다.
두산도 빠르게 움직였다. LG가 김기태 감독을 발표한 이틀 후인 10월9일 김진욱(51) 투수코치를 감독으로 계약 발표했다. 야구계는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진욱 감독은 전임 김경문 감독이 만들어 놓은 ‘허슬 두(Hustle Doo)’의 팀 컬러를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가족 우애와 전통을 중시하는 두산 그룹의 분위기, 사장과 감독 모두 내부 승격을 통한 팀 화합 추구 등이 두산 감독 선임에서 잘 나타났다.
◆성적은 나빠도, 오너들의 관심과 애정은 '넘버1'
공동 6위를 기록한 한화는 변함없이 김승연 그룹 회장이 구단주이다. 그런데 주목할 변화는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에 전념해 종전에는 대행을 두기도 했는데 올시즌 직접 구장을 찾아 야구단을 격려하는 등 적극적으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특히 다른 구단들의 투자와 지원을 지켜본 김승연회장은 일본 지바 롯데에 진출했다가 한국프로야구로 복귀하는 한화 출신 타자 김태균을 반드시 잡도록 하겠다는 등 그룹 차원에서 최대한 전력 보강을 공개적으로 약속해 주목 받고 있다.
7위 넥센 히어로즈는 대외적인 구단주가 있고 실질적으로 투자 그룹 대표인 이장석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다른 구단들과는 달리 그룹사 체제가 아니어서 지원이 없고 넥센 타이어가 메인스폰서로 독자 경영된다.
◆신흥부호의 '제 9구단'...야구판도 흔들까
마지막으로 2013년 페넌트레이스에 진입하는 신생 구단 NC다이노스가 있다. 구단주는 NC소프트 김택진(44) 사장이다. 김택진 사장은 선친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2세, 3세, 4세 구단주들과는 달리 자수성가해 야구단을 창단했다.
새로운 산업인 게임으로 부(富)를 이뤄 10월 재벌닷컴 발표 순위에서 개인 재산 순위 12위(약 1조8,251억원)에 오른 김택진 구단주는 프로야구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올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초대 감독으로 두산에서 자진 사퇴한 김경문 감독을 선택해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
1982년 출범할 당시 과거의 한국프로야구는 ‘10대 재벌’을 중심으로 군인 정권인 전두환 대통령이 강제로 만든 판이었다.
현재의 프로야구는 가업을 승계한 새로운 구단주들의 패기와 자존심이 격돌하는 무대가 됐다. 여기에 게임 산업을 대표하는 신흥 부호가 가세해 미래의 프로야구가 더 흥미로워졌다.
한국프로야구는 지난 해 통산 1억 관중을 돌파했고 금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정규시즌 600만 관중시대(680만9,965명)를 열었다. 10구단까지 창단되고 대구 광주 대전 구장이 신축되면 1,000만 관중시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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