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서 잡은 ‘7평짜리 희망’

머니위크 김진욱 기자 | 2011.10.23 09:13

[머니위크 커버]40대, 우린 이렇게 산다/ 문준용 대표의 ‘버들골’ 인생

서울에서 가장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을 떠올린다면 단연 이태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거니와 가게의 간판만 해도 한글보다는 영어가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같은 이미지즘 속에는 충분히 상대적인 원리가 작용한다. 이국적인 이미지가 풍성한 곳이기에 오히려 한국적인 색채가 짙은 곳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 수도 있다.

‘감성 퓨전 포장마차’라는 독특한 컨셉트를 내세운 ‘버들골이야기’라는 술집이 딱 그런 곳이다. 도로 변이 아니어서 눈에 띄지도 않고 수십여 개의 계단을 낑낑거리며 내려와야 찾을 수 있지만 이태원에서 한국적인 술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특별한 가게다. 저녁만 되면 대형 할인마트 못지않게 단골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묘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류승희 기자)

◆'바닥' 맛본 후 시작한 사업

“제가 사장입니다.”

전혀 사장답지 않은 풍채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며 나타난 버들골이야기의 문준용(48) 대표. 권위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아저씨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그는 전국에 90여개의 프랜차이즈점을 운영하는 전도유망한 기업의 오너다.

그러나 지난 1998년 이태원 뒷골목의 7평짜리 매장에서 장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인생에서 가장 ‘바닥’의 길을 걸었던 남자다.

군 제대 후 시각디자인 학원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문 대표는 광고회사를 차려 운영하던 중 한 친구의 신발공장이 문을 닫게 되자 그곳을 인수하며 사업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신발에다 지워지지 않는 특수물감으로 만화캐릭터를 직접 그려넣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템을 팔았던 덕분에 그가 내놓은 상품은 시장에서 크게 히트를 쳤고 회사의 규모도 꽤 커졌다.

“오만방자했어요. 주변에서는 너무 사업을 크게 벌리지 말라고 그렇게 조언을 했는데 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제조업은 최소한의 여건으로 최대의 부가가치를 발생시켜야 되는데 시스템 투자에만 너무 집중했어요. 그 때 IMF가 터진 거죠.”

IMF 이후 2년간을 은행과 사채는 물론 지인들에 빌린 돈으로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노력했던 그였지만 결국 신발회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실패의 좌절감은 그에게 '인생의 낙오자'라는 자괴감을 심어줬고 급기야 가족들을 남겨둔 채 가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 때 나이가 30대 중반. 가장이라면 한창 돈을 벌어야 할 시기에 2년간을 집을 나와 생활했고 고시원과 친구집을 들락날락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떠돌다 한번은 친형이 관리하는 주차장의 콘테이너 박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당시에는 세상에 대한 증오감만 커지더라고요. 너무나 안돼 보였는지 형이 어느날 1000만원을 건네주면서 라면가게라도 해보고 살라고 했습니다. 너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절박한 순간이었죠.”

◆ 컨테이너 박스 생활 청산…2000만원으로 버들골 탄생

그 길로 아내가 지인을 통해 융통한 돈 1000만원을 더해 총 2000만원의 사업자금으로 현재의 버들골이야기 ‘본점’을 차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13년전의 일이다.


보증금 1500만원에 권리금 250만원을 주고 남은 돈은 단 250만원. 인테리어를 할 비용도 안돼 그 돈으로 페인트를 칠하고 가게 내외관을 정리하는데 다 썼다. 그리고는 바로 가게를 오픈했다. 물론 그 때부터 또다른 ‘시험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 자리는 그 전 사장이 조개구이집으로 9개월 운영하다 문을 닫았을 만큼 장사가 계속 안되는 곳이었다. 여기에 음식점을 운영한 것도, 실내 포장마차를 차려본 적도 없었던 문 대표였기에 음식 맛이 훌륭할 리 만무했다. 손님은 끊겼고 다음날 아침 7시까지 꼬박 11시간을 장사 했어도 하루 매출은 2만원을 채 넘지 못했다.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을 버텼죠. 너무 장사가 안돼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왜 손님들이 음식을 남기고 갈까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요리에만 파고 들기 시작했죠.”

문 대표가 음식에 ‘맛’을 내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도 가게의 인테리어 덕분이다. 요리솜씨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미술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매장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단풍잎, 솔잎 등을 가게 곳곳에 배치해 낭만스런 분위기를 연출했고 오는 손님들에게는 가게 어느 벽이든 자신들의 사연을 담은 메모를 붙여놓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메모지 인테리어'가 버들골을 대표하는 심볼이 됐다.)

손님을 배려한 주인장의 심성이 통했는지 서서히 손님들도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몇몇 손님들은 문 대표에게 “인테리어가 참 예쁘다”면서도 “내가 잘 가는 단골 술집이 있으니 거기 가서 요리법을 한번 배워 보라”고 벤치마킹할 ‘맛집’들을 추천했다.

이후 문 대표는 3년여간을 전국의 맛집을 돌며 스스로 ‘맛의 비법’을 터득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대박가게'의 반열에 올랐다. 손님들의 발길은 많아졌고 주변에서는 “2호점을 내고 싶다” “직영점을 내달라”며 프랜차이즈점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 두 개 점포가 늘어나더니 어느 덧 90호점까지 만들어지게 됐다.

도대체 노숙인의 생활에 가깝게 처절한 삶을 살았던 문 대표가 40대의 끄트머리에서나마 인생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일까. 가게의 이름이기도 한 ‘버들골’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사진=류승희 기자)

◆"밀리면 끝장이다" 정신으로 일군 성공

“13년 전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 바로 앞에 140년 된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하지만 수명이 다 돼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뽑혀버렸죠. 그래도 한 곳에서 140년간을 뿌리 내리고 살았으니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시련을 다 버텨낸 나무였겠습니까? 저도 저 버드나무처럼 한 기업의 대표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꿋꿋이 살아가야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게 됐습니다.”

문 대표의 버들골이야기는 해산물 전문 실내포차로 현 이태원 본점의 경우 하루 매출 150만원, 월 매출 4500만원으로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평일 저녁이라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한 두시간은 기본적으로 기다려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 정도다.

본점 매장은 창업 당시보다 2배 늘린 15평 규모가 됐고 매월 2회씩 연구개발(R&D) 센터에서 예비 창업주들을 위한 체험사업설명회를 열어야 할 만큼 인기있는 중견 프랜차이즈 기업으로도 성장했다.

마흔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성공’의 단 열매를 맛보게 된 문준용 대표. 그가 늘 가슴 속에 품고 산 말이 있다.

‘밀리면 끝장이다!’

7평의 좁은 매장에서 장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다짐했던 내용이다. 인생의 절벽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조금이라도 뒤로 밀리면 곧 죽음이기 때문에 처절함과 끈기로 자신의 목표점에 다다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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