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시켜준대도 뮤지컬··· 내 인생 최고의 일흔살"

머니투데이 최우영 기자 | 2011.08.22 06:00

[10년 늘어난 중년, New Old] <9>뮤지컬 배우 정상기씨

ⓒ뮤지컬을 시작한 이후 정상기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뮤지컬은 내 세속적인 욕심을 다 내려놓고 머리를 맑게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그에게 뮤지컬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제2의 인생'인 셈이다.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뮤지컬 배우답게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상기씨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지난 1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구석구석을 3시간여 누비며 인터뷰를 했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뮤지컬 배우답게 체력도 탁월했다.

정씨는 "30여년의 서울시 공무원, 뒤이어 8년여 중소건설회사 회장 때도 지금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구름을 타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렇다고 정씨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배우도 아니다. '어르신연극교실' 출신의 경력 6년차 아마추어일 뿐이다. 출연작도 다섯 개에 불과하다. "그래도 누가 평생 살면서 '이수일과 심순애'의 김중배 역할을 한번 해보겠습니까. 세상 멋있게 살면서 다이아 갖다 주며 여자 꼬시는 역할을 말입니다."

정씨는 2006년 은퇴하고 나서 실은 골프에 심취했었다. 서울 성동구청 재무국장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뒤 작은 건설회사 회장으로 있으면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 골프를 시작했기 때문에 허리에 무리가 왔다. 그는 "한의원 가서 침 맞아가면서까지 골프를 할 정도로 좋아했는데 결국 허리수술을 하면서 그만둬야 했다"고 말했다.

골프를 접고 수술까지 한 정씨는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세상이 힘들고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취미생활로 시작한 게 시 낭송과 가곡 공부. 시 낭송은 살면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분야였다. "전주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선생님이 바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를 쓰신 고 신석정 시인이었죠. 시를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인지 그때 알았습니다. 은퇴하면 꼭 시 낭송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왔었죠." 정씨는 한국시낭송협회에서 개최한 전국 시낭송대회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다.

가곡 공부는 평생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했는데, 구령소리 연습을 위해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어요. 그걸 기억하던 고등학교 동창이 성악 공부를 권하더군요. 엉겁결에 시작한 셈이죠."

그는 서울 광진문화원과 강남문화원에서 시 낭송을 공부하고, 또 독학으로 가곡공부를 병행했다. 그러다 우연히 충무아트홀 어르신연극교실 광고가 정씨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다 싶어서 그 길로 곧장 등록을 했죠." 혹독한(?) 발성연습과 복식호흡 등을 연마한 끝에 정씨는 연극교실 멤버들과 함께 뮤지컬 '마이웨이'로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마이웨이는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노인들이 지난날의 추억들을 되살린다는 줄거리였다.

ⓒ서울 중구 실버뮤지컬단이 지난 6월 경남 거창에서 열린 실버연극제에서 금상을 차지한 뮤지컬 '아름다운 인생'에서 공연중인 정상기씨. 윗 사진은 맨 오른쪽, 아래 사진은 뒷줄 왼쪽 첫번째가 정씨이다. (중구 실버뮤지컬단 제공)
드디어 2008년 정씨에게도 프로데뷔의 행운이 찾아왔다. 극단 에이컴이 아일랜드 극작가 기슬리 가다슨 원작의 '러브' 공개 오디션을 열었던 것. 러브는 요양원에서 만난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연출자로부터 "연기력 있다"는 칭찬까지 들으며 오디션을 통과한 정씨는 연극배우 김진태, 전양자씨와 함께 무대에 서게 됐다. 비록 앙상블(연극에서 주·조연을 제외한 다수의 합창 배우)에 불과했지만, 6개월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면서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을 만끽했다. '프레드'라는 정식 배역도 있었고, 100만원에 불과했지만 처음으로 월급도 받았다. 더블캐스팅(한 배역을 두 명이 날짜별로 번갈아가며 공연하는 시스템)이 된 배우가 중도에 그만두면서 강행군을 하기도 했지만, 정씨는 이런 고생마저 감미로웠다. 그는 "5개월동안은 혼자서 프레드 역을 맡아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평일은 매일, 주말에는 하루 2차례씩 무대에 섰지만 나이 들어 행복이란 것이 어떤 건지 실감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현재 서울 중구 실버뮤지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중구 실버뮤지컬단은 지난 7월 경남 거창에서 열린 실버연극제에서 핵가족화 이후 자녀들에게 버림 받은 노인들이 '물질적인 가치'에 휘둘리는 세태를 세 쌍의 노년 부부들의 대화로 익살스럽게 풀어낸 '아름다운 인생'으로 금상, 연출상, 연기상을 휩쓸기도 했다. 그는 "이제껏 맡은 배역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배역이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인생은 실버뮤지컬단 단원들의 캐릭터에 맞춰 만들어진 창작 연극이었는데, 제가 맡은 정상기 역은 외향적이고 즐기며 생활하고, 무엇보다 시를 좋아하는 배역이었죠."

요즘 정씨의 모든 생활은 뮤지컬에 맞춰 진행된다. 일주일에 3번씩 오후 2시부터 5시 반까지 단원들과 함께 연습실에 모여서 뮤지컬 연습을 한다. 또 매일 아침마다 수영과 헬스 등을 하며 체력관리를 하고, 시간 날 때마다 올림픽공원 구석구석을 달린다. 뮤지컬 배우에게는 체력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사진을 찍으면서도 정씨는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찾아 먼저 공원을 휘젓고 다녔다.


정씨는 "70년을 살아오면서 머리가 맑았을 때는 뮤지컬을 하는 지금뿐"이라고 했다. "공무원 시절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담배도 많이 피웠어요. 동료들이 승진하고 내가 누락되면 그 스트레스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거든요." 정씨는 뮤지컬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담배도 끊었다. 담배를 끊으니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뮤지컬을 하고 나니 세상의 욕심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노래하고, 춤 추고, 연기를 하다 보면 머리와 영혼이 맑아지는 듯해요. 만일 누가 지금 나에게 대통령 할래? 뮤지컬 할래? 물어보면 당연히 '뮤지컬'이라고 답할 겁니다."

정씨는 '언제까지 무대에 설 것이냐'는 질문에 "언제까지라고 한계는 정해놓지 않고 매일매일 충실히 살아갈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딱히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며 "현재에만 충실하게 살다 보면 얼마든지 즐겁게 계속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년 불태울 길은 많다
서울 26곳 비롯 전국 88곳에 문화원, 합창단·극단은 해당 구에 거주해야

뮤지컬 뿐 아니라 합창, 연극 등 무대에서 노년을 불태울 수 있는 길은 많다. KBS '남자의 자격' 실버합창단 외에도 실버극단과 실버합창단 등 60대 이상을 위한 등용문이 다양하게 열려있다. 정상기씨도 신문광고와 인터넷검색을 통해 충무아트홀 어르신 연극교실과 극단 '에이컴'의 공개 오디션, 중구 실버뮤지컬단을 알게 돼 무대에 데뷔했다.

1996년 창단한 서울시 송파구립 실버합창단과 2003년 창단한 경기도 성남시 실버합창단은 역사가 깊은 실버합창단이다. 최근 들어 각 시 단위 실버합창단과 각 구 단위 문화원 소속 합창단들이 속속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춘천시립노인복지회관 산하 '춘천실버예술단'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실버합창단이다.

극단 중에는 인천 남구 학산문화원 산하의 '학산'과 경기 수원시 버드내노인복지관 산하 극단 '슈퍼스타'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하는 실버뮤지컬단도 인기인데, 정씨가 활동하는 '서울 중구 실버뮤지컬단'은 국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실버뮤지컬단이다. 정씨는 "뮤지컬단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실력을 최소한 쌓을 필요가 있다"며 "광진문화원과 강남문화원에서 배운 시 낭송이 나중에 무대에 설 때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현재 서울시내 26곳을 비롯해 전국에 88곳의 지역 문화원이 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홈페이지(http://kccf.or.kr/)에서 '연합회소개→지방문화원찾기' 메뉴로 들어가면 자신의 거주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의 문화원을 확인할 수 있다. 단, 대부분의 문화원 산하 합창단과 극단은 '해당 구 거주 여부'가 가입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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