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등 주요 석유 소비국으로 구성된 IEA는 이번 조치가 리비아 내전 등에 따른 원유 공급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행동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비국들은 고유가 상황에서 산유국들의 증산을 기대했지만 이달 초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이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증산을 보류하면서 양쪽 간 갈등이 깊어져 '석유 무기화'를 두고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방의 역습=
이날 IEA는 비축유 6000만 배럴을 방출하겠다고 밝혔다. 1974년 설립 이후 세번째 방출이며 6년 만의 조치다. 규모로는 1991년 이후 최대다. 미국이 절반인 3000만 배럴을 방출하고 나머지는 일본과 독일, 프랑스, 스페인이 나눠 푼다.
IEA의 비축유 방출 계획 발표에 국제유가는 급락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8월 인도분 선물은 전일 대비 4.60% 하락한 배럴당 91.02달러를 기록했다. 장중에는 89.69달러(-5.72%)까지 떨어지며 90달러선을 내주기도 했다. 또 런던석유거래소(ICE)에서 북해산 브렌트유 8월 인도분 선물은 6.09% 하락한 107.26달러를 기록했다. 장중에는 최대 7.43% 하락했다.
주식시장까지 동요가 확산돼 뉴욕 증시에서는 에너지주가 급락했으며 원유시장 혼란에 투자자들은 미 국채 등 안전자산에 몰리면서 미 국채 10년물 수익률은 8bp 하락한 2.91%로 지난해 12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처럼 글로벌 금융시장에 적지 않은 충격을 몰고 온 IEA의 비축유 방출 결정은 미국 등 서방 석유 소비국들이 산유국 카르텔인 OPEC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라는 분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8일 OPEC이 정례 총회에서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 반미 회원국들의 주도로 증산을 보류한데 따른 서방의 대응 조치라고 설명했다.
특히 휘발유 가격 상승으로 경기둔화를 우려하는 미국이 사실상 방출 결정을 이끌어 냈다는 분석이다. 미국 정부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글로벌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원유시장의 안정을 위해 IEA가 방출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스티븐 추 미 에너지부 장관은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유가 안정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미 의회에서는 비축유 방출이 너무 늦었다는 불만까지 나왔다. 또 미국 정부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IEA에 비축유 방출을 요구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부에선 IEA가 최근 지위에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도 미국의 의도에 부합, 이같은 결과를 이끌어 냈다고 봤다.
◇OPEC 대항기구 IEA=
IEA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에 있으며 OECD 회원국 중 28개국이 가입해 있는 선진국들의 대변 기관이다. 최근 산유국을 묶는 OPEC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들의 가입을 추진해 왔지만 이들이 선진국 프레임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며 관망 태도를 보여 세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번 비축유 방출은 IEA의 존재 의미를 국제사회에 재인식시키려는 목적도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이같은 의도는 IEA의 설립 취지에도 부합한다. IEA는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지난 1974년 OPEC 등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를 막기 위해 미국 주도로 설립됐다.
◇OPEC의 반발=
미국 주도의 공세에 OPEC도 당장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부 OPEC 회원국들이 보복 조치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한 OPEC 회원국 관계자는 "유가가 하락하고 과잉공급이 일어난다면 OPEC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이를 바로 잡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다른 관계자들도 "놀랍고 부당 조치로 IEA는 자기 이익대로만 행동하고 있다"거나 "IEA는 미국과 정치적으로 행동한 것일 뿐"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해리 칠링기리언 BNP파리바 투자전략가는 "IEA의 조치는 역풍을 몰고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IEA와 미국은 이번 결정이 산유국과의 사전 협의를 거친 것이라고 했지만 OPEC의 반응은 그같은 설명과 다르다. 리처드 존스 IEA 사무차장은 "방출 결정에 앞서 OPEC 회원국들과 협의했다"고 밝혔으며 오바마 행정부 고위 관계자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들의 노력을 보완하려는 의도로 주요 산유국들과 완전히 협의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단 미국과 IEA가 사우디 등 OPEC 친미 국가들의 암묵적 동의를 얻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따라서 OPEC 내 친미-반미 분열이 더욱 깊어지고 반미 국가들은 결속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또 반미 산유국 주도로 유가를 다시 띄우기 위한 대응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커진 변동성..하락 전망 대세=
미국과 IEA의 의도는 이란 등 반미 국가들의 입김이 세진 OPEC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데 있다. 석유 전문 독립 애널리스트인 존 홀은 "IEA의 조치는 사우디 등 친미국가들을 제외한 OPEC 회원국들을 겨냥한 조치"라고 말했다. 따라서 앞으로 미국과 OPEC의 대립, OPEC의 분열 등 다양한 변수들로 인해 원유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은 이들이 많다.
이같은 상황과 구도를 반영해 다수 전문가들은 이날 당장 유가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데이비드 그릴리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는 "가솔린이 많이 포함된 경질 원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브렌트유 가격의 향후 3개월 전망치를 105~107달러로 기존보다 10~12달러 하향 조정했다.
JP모간도 브렌트유의 3분기 평균 가격을 기존 130달러에서 100달러로 대폭 낮춰 제시했다. 로렌스 이글스 애널리스트는 "30일 동안 6000만 배럴이 풀리면 유가 급락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시간으로 24일 오전 현재 국제유가는 소폭 상승 반등했다. 비축유를 풀어도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라는 일부 관측이 반영됐다. 오전 10시59분 현재 NYMEX 전자거래에서 WTI 8월 인도분은 전일 대비 0.76% 상승한 91.71달러를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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