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날로그를 꿈꾼다

머니투데이 정영일 기자 | 2011.06.24 08:00

[창간 10주년 기획/나는 아날로그다(2)]아날로그를 꿈꾸는 사람들

한 TV 프로그램에 출현한 평균 나이 64세의 가수들이 '쎄시봉' 열풍을 일으켰다. 생맥주와 청바지, 통기타와 포크 음악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청년 문화가 4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2011년 현재 다시 살아난 것이다.

'쎄시봉 열풍'은 단순한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최근 통기타를 사기 위해 낙원상가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20~30대다. MP3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와 함께 자라난 세대들이 오히려 '쎄시봉'으로 대표되는 아날로그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1970년대 이후 압축적으로 진행된 산업화와 공업화 같이 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디지털 IT혁명으로 인한 쏠림 현상에 대한 반작용이 최근의 아날로그 열풍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숫자 0과 1, 효율성과 편리함으로 대변되는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 '따뜻한 삶'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쎄시봉 열풍과 아날로그 열풍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MP3 음악이 아닌 LP판의 투박함을 좋아하고 필름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비는 사람들이 모두 아날로그 열풍을 함께한다. 디지털 기업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아날로그 열풍을 흡수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치열함과 빠름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인간미를 '디지털 속 아날로그'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과 가까이 하는 진정한 인간 삶의 여유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날로그가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날로그를 꿈꾸는 사람들

한국거래소에 근무하는 전철홍 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LP마니아'다. 집에 가지고 있는 레코드(LP, Long Playing)판만 800장에 이르고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는데 족히 "외제차 한대 값"은 들어갔다.

전 부장은 "'LP마니아'라고 불리기에는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주변에 LP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서울 회현동 지하상가의 중고 LP판매상이 손님이 끊이질 않고 아날로그 오디오부품 업체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LP는 '느린 삶'의 여유를 대변하는 매체"라고 한다. 나란히 꽂혀 있는 수많은 LP판 가운데 듣고 싶은 음반을 꺼내 재킷을 감상하고, LP판의 상태를 점검한 후 먼지를 닦고, 톤암의 바늘을 정조준 해 판 위에 올리는 일련의 행위를 하나의 '의식'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전 부장은 "디지털 기기를 대표하는 CD도 물론 편리한 사용법과 깨끗하고 박력 넘치는 음색 등 탁월한 점들이 많다"며 "물리적 특성은 떨어져도 LP판은 순수한 '음(音)'과 추억이 담겨져 있어 또 다시 찾게 된다"고 말했다.

홍보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 강성규씨(35)는 주말이면 필름 카메라 라이카 M6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디지털 카메라인 라이카 M8도 함께 가지고 있지만 필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강성규씨는 "필름 카메라는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찍은 사진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필름 카메라는 인화와 현상과정을 거쳐 사진을 손에 들게 될 때까지 길게는 1주일까지 걸린다고 한다.

그 1주일을 기다리는 짜릿함을 즐긴다. 그는 "포토샵을 하면 디카 사진으로도 필카와 유사한 느낌을 낼 수는 있다"며 "필름 카메라는 일일이 상황에 따라 맞춰줘야 하는 세팅이 많다는 불편함은 있지만 디카에 비해 훨씬 마음에 와 닿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있는 필름카메라 동호회의 회원수는 무려 7만7000여명. 강씨가 활동 중인 동호회는 회원은 30여명이지만 5년 이상 매주 함께 출사(사진을 찍기 위한 여행)를 했다. 강 씨는 "가족이나 친지 이상으로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디지털이 만들어가는 아날로그 세상=

아날로그 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MBC 예능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주목받았던 가수 정엽씨가 속해있는 보컬그룹 브라운아이드소울은 아예 LP판으로 새 음반을 냈다.


서울 곳곳에서 LP판으로 노래를 틀어주는 바가 유행처럼 생겨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쎄시봉 열풍과 함께 낙원상가의 통기타 판매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며 통기타를 생산하는 삼익악기는 지난해 보다 20~30% 주가가 상승하기도 했다.

아날로그의 정반대에 서 있는 최첨단 디지털 기기들도 속속 아날로그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태블릿 PC에 구현되는 전자책이 대표적이다. 전자책은 화면을 넘길 때 실제 책장을 넘기듯 스크린의 화면을 넘긴다.

터치패널 업체 이멀젼은 터치 스크린에서도 키보드의 버튼을 누르는 느낌을 구현하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올림푸스는 2009년 디지털 카메라 PEN을 출시하면서 1959년에 출시된 아날로그 카메라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왔다.

아날로그라는 트렌드를 선도하기 위해 기업들은 '인간'에 대한 연구, 즉 인문학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들이 담아내지 못했던 인간의 욕구를 파악하고 담아내기 위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유저 인터페이스 연구진에 기술 엔지니어보다 디자이너를 더 많이 선발하고 인터넷 기업 야후도 인터넷 사용자들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수십명의 사회과학자를 고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텔은 2010년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상호작용·경험'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미래에 인간이 컴퓨터와 인터넷 등 IT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지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다.

△왜 아날로그 인가

왜 아날로그로의 회귀일까. 우선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LP마니아인 전 부장이나 필름 카메라 마니아인 강 씨 모두 "왜 아날로그인가"라는 질문에 "향수" "아날로그적 감수성" 등의 답변을 내놨다.

전 부장은 "LP판을 듣고 있다 보면 음악에 과거 LP를 처음 샀을 때의 향수가 덧붙여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고, 강씨는 "필름 카메라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날로그 열풍에 대해 과거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급격한 디지털 시대로의 사회변동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했다. 디지털 시대로의 급격한 쏠림이 오히려 아날로그라는 역작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손으로 만져지고 손때나 시간의 흔적이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속성이 있다"며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에 잠시 취해 있다가 다시 원래의 속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복제의 편리함'에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디지털 콘텐츠는 편리하고 깔끔하지만 그만큼 비슷한 복제품도 많고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반면 아날로그 오디오나 필름카메라 등 아날로그는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무궁무진한 변화가 가능하고, 그 변화 속에 '스토리'가 담기게 되면 아날로그 특유의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김찬호 교수는 "LP판은 자켓이 가지고 있는 허름한 종이라는 요소가 있다"며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고유한 느낌이 아날로그에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즐겨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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