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주목받는 '정주영 리더십'

머니투데이 서명훈 기자 | 2011.03.10 06:05

"새 생각이 새 가능성 연다" ' New Thinking' 원조

편집자주 |  대한민국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오는 21일로 10년을 맞는다. 현대건설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현대상선 등 한국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그의 손으로 놓였다. 거목(巨木)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정 명예회장 타계 이후 현대그룹은 셋으로 갈라지며 큰 시련을 맞기도 했다. 다행히 10년이 지난 지금 '뿌리 깊은 나무' 현대는 현대건설까지 되찾는데 성공하며 다시 넉넉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맨 땅에서 수십만 명을 먹여살리는 기업으로 키워내고 권력 앞에서도 쓴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던 그를 그리워하는 이가 적잖다. 이에 정 명예회장은 어떤 말을 해줄까. 그가 남긴 유산과 발자취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결단력과 추진력의 화신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아이디어 샘솟는 불세출의 기업가."(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 효성그룹 고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경제인들은 그를 뛰어난 창의성과 결단력, 추진력을 갖춘 최고경영자(CEO)로 평가한다.

정 명예회장 10주기 추모위원장을 맡은 이홍구 전 총리는 "비록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정 명예회장이 남긴 '지혜를 모아 방침을 세우고 하면 된다'는 정신은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며 "추모위원장을 선뜻 맡은 것도 이런 그의 삶의 철학과 기업가정신을 되살려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의 리더십은 21세기에 더욱 필요해 보인다. 그의 리더십을 되돌아보자.

◇"뉴 싱킹(New Thinking)의 원조"=현대자동차는 최근 브랜드 슬로건을 '뉴 싱킹, 뉴 파서빌리티'(New Thinking, New Possibility)로 교체했다.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의미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뉴 싱킹'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4년 정주영공법으로 관심을 모은 서산 간척사업 현장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

6·25전쟁 와중인 1952년 12월. 당시 정 명예회장은 가족들과 헤어져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면서 미군관련 공사를 대거 수주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각국 유엔사절이 내한해 참배할 계획인데 흙으로만 겨우 덮어놓은 묘지를 차마 보여줄 수가 없었던 것. 남은 기한은 겨우 닷새였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이 공사를 정 명예회장은 아이디어 하나로 해결했다. 그는 미군이 요구하는 것은 잔디가 아니라 유엔사절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파란풀을 원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낙동강변에 있던 보리를 모두 옮겨 심었다. 미군은 정 명예회장에게 실제 공사비의 3배를 지급했다.

정 명예회장은 1970년대 세계 최대 공사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해안선에서 12㎞ 떨어진 30m의 바다 한복판에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터미널을 만들려면 해양 심해 구조물 설치가 필수였다. 그는 울산에서 제작한 철골 구조물을 커다란 바지선에 실어 중동현장으로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000㎞. 경부고속도로를 15번 왕복하는 거리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정 명예회장은 재킷 설치공사 착수와 함께 재킷을 연결하는 빔 제작을 현대의 설계도대로 울산에서 하도록 했다. 수심이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중량 500톤짜리 재킷을 한계오차 5㎝ 이내로 꼭 20m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서고 있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문에 선진국들도 일단 재킷설치가 끝난 후 그 간격을 재서 빔을 제작하던 터였다. 오차가 5㎝만 넘으면 빔을 깎아 줄일 수도, 붙여 늘릴 수도 없어 그냥 버려야 했다. 감독관들은 당장 계획을 중단하라고 요청했지만 공기단축을 위해 그대로 밀어붙였다.

결국 현대는 89개 재킷을 5㎝ 이내 오차로 완벽하게 설치했다. 당시 감독관들은 현대의 창의적이고 담대한 수행계획과 속출하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한국 근로자들의 근면성에 혀를 내둘렀다.


정 명예회장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서산간척지 건설 때 폐유조선으로 물막이를 대신한 것이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한 일화는 그만이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소떼 방북 장면을 보고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도전하지 않으면 미래 없다=정 명예회장을 얘기할 때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추진력'이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만류하는 일도 끝까지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그의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현대자동차도, 현대중공업도 없었을 것이다.

소양강댐은 정 명예회장의 이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 처음 소양강댐은 콘크리트댐으로 설계하도록 돼 있었다. 대일청구권 자금이 일부 투입되는 것이어서 일본공영이 설계에서 기술·용역까지 맡았다. 댐기술이 없었던 탓에 하자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막대한 물량의 시멘트나 철근 등 수입 자재를 쓰기보다 주변에 널려있는 자갈과 모래를 이용하는 편이 더 경제적이란 결론을 내렸다. 흙과 모래, 자갈을 사용해 사력(砂礫)댐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일개 건설업자가 정부 발주공사에 대안이라는 것을 내놓은 것은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정 명예회장의 손을 들어줬고 사력댐으로 건설된 덕분에 소양강댐 건설비용을 30%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500원짜리 지폐 1장과 백사장 인공위성 사진 하나로 2척의 유조선을 수주한 일화 역시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을 잘 보여준다. 세계 1위 조선사 현대중공업은 이렇게 탄생했다.

정 명예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처음 제대로 된 사업을 자동차로 시작한 인연도 있었지만 기계공업을 발전시키는데는 자동차가 최고라는 믿음에서다. 1966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꾸준히 독자모델 개발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다. 하지만 당시 독자모델 개발을 반기는 이는 회사 내부에 많지 않았다.

당시 정세영 현대차 사장은 정 명예회장의 지시로 이탈리아에 스타일링과 설계용역을, 유럽 최고 스타일리스트 조지아로에게 해외로 수출이 가능한 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다.

이렇게 탄생한 모델이 바로 '포니'다. 정 명예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포니' 출시와 동시에 1억달러를 투자해 5만6000대 규모의 공장 건설에도 착수했다. 지금 세계 5위 자동차회사로 성장한 현대자동차는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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