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대상 수상작]아버지의 여로<2>

머니투데이 임성간  | 2011.01.01 11:16
겨울이라 차창 밖 풍경은 메마르고 황량했다. 옅은 황토빛 들판과 그 들판에 열을 서듯 정렬해 있는 올리브 나무들이 끝도 없이 지나갔다. 호텔에서 늦게 일어나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허둥대며 코르도바행 특급열자를 탔을 때만 해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편치 않았다. 그러나 쾌적하고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한 열차 속에서 마음은 점차 안정되어갔다.

열차 안에는 다정한 부부로 보이는 두 쌍의 나이든 관광객도 타고 있었다. 나는 눈이 자꾸만 그쪽으로 향했다. 아내와 나 사이에 서로 애정이 없어졌다고 생각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지금은 그저 세상이 정한 도덕적 기준에 맞추어 타성적으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의 입장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차창 밖으로 올리브 나무가 드문드문 스쳐 지나갔다. 옅은 적갈색 들판은 아라비아의 사막을 연상시켰다.

천 년의 때가 끼어 있는 중세의 성문을 들어서자 좁은 길들이 여기저기 미로처럼 갈라져 있었고, 어두컴컴한 상점 안에는 알라딘의 램프나 향로 같은 물건들이 가게 앞까지 늘려 있었다. 길옆으로는 머리에 카피예를 쓴, 움푹 들어간 눈에 광채가 나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팔자수염의 노인네가 양탄자를 깔고 앉아, 긴 촛대 같은 물담배와 연결된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큰길에서도 차가 어쩌다가 보였지만 성(城)안 좁은 길에 차가 다닐 리 없었다.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사내들은 귀금속 등으로 잔득 멋을 내어 화려하게 장식한 잠비아라는 단검을 배 앞에 차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인네들은 검은 천의 베일로 온통 얼굴을 가려 눈마저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눈을 내놓은 베일을 쓴 여인도 지나다녔는데, 외국인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진흙과 벽돌로 지어진 6-7층 건물도 그 모양이 독특했다. 건물의 창은 채색유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창 둘레의 벽에 하얀 석고를 바른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로움을 자아내었다. 나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주재하는 상사주재원으로 예멘의 수도 싸나에 첫 출장을 간 아버지의 일기 속에 있는 글이었다. 코르도바에도 혹시 이런 전통적인 아랍의 모습이 남아 있을까? 코르도바는 한 때 바그다드와 자웅을 다투며 세계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시대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역 앞 광장엔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오렌지나무와 종려나무로 들어찬 공원의 숲길 같은 도로를 얼마간 달리던 택시는 중세 도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누가 보아도 시간에 풍화되고 있는 모습이 짙게 드러나는 고풍스런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아버지도 이 길을 따라 코르도바로 들어왔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아니 라니아란 여인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

호텔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한 후 열쇠를 받아들고 3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늘한 어둠 속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이슬람 풍의 방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아치형의 창 가장자리에 아랍문자로 자카드 수를 놓은 보라색 커튼이 양쪽으로 걸려 있었고, 방의 하늘색 천장과 미색 벽 가장자리에 금색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가방을 한 쪽 구석에 밀어두자마자 풀썩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내 몸은 침대 속으로 마냥 가라앉아갔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팍팍한 삶들이 저 멀리 아득히 비현실의 세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천정, 벽, 커튼의 이슬람의 복잡한 문양들이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리며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내 몸이 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 눈감으면 찾아 드는 검은 그림자 …… 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에 공주’어릴 적에 아버지는 이 노래를 잘 흥얼거렸다고 했다. 성능이 좋지 않은 극장 마이크에서 왕- 왕- 울리는, 그래서 어떤 구절은 가사도 분명치 않던 이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리며 마치 향수에 젖듯 달콤하고 황홀한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져들곤 하던 소년, 밤마다 비록 잠자리 머리맡에서는 당장 내일의 삶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이야기 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와도 마음은 어느새 별들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뿌려진 검푸른 밤하늘을 피터팬처럼 날아 저 멀리 아라비아 반도로 꿈결처럼 날아가던 소년, 환한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눈이 부신 돔형의 첨탑 아래 붉고 푸른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살짝 밀고 살포시 내려앉으면 촉촉하게 젖은 커다란 검은 눈의 아름다운 아라비아 공주가 도톰한 붉은 입술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맞이하는 밤마다의 환상에 빠져들던 극장 앞 골목의 소년……

아버지는 이렇게, 어릴 적 그 곤궁하고 신산한 전쟁직후의 삶 속에서 아라비아 공주의 꿈을 꾸었다.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에도, 그리고 청년기에 이르러서도 그 꿈을 가슴 속에 계속 담고 있던 아버지는 상사의 중동주재원으로 발령받고 나갔을 때의 들뜬 마음을 이렇게 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종합상사에 입사했고, 바삐 돌아가는 현실 속에 묻혀 직장생활을 한 지 3년쯤 지날 때였다. 어느 날, 어릴 때부터의 환상이 성큼 내 앞에 현실의 세계로 가까이 다가올 줄이야! 아득히 멀고 먼, 그저 이야기 속의 세상으로만 여겼던 상상 속의 그 아라비아의 나라로 나는 정말 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폭등한 원유 값으로 검은 황금의 나라가된 사우디아라비아에 회사에서 새로 지사를 설치했고, 그 지사에 내가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도착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도시, 제다는 현대 어느 나라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차량과 인파로 붐비는 번잡한 도로와 지저분한 뒷골목이 있는 평범한 항구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려보던 환상의 아라비아는 아니었다. 물론 그곳에 아라비아의 공주가 있을 리 없었다. 현실인 아라비아의 땅에서 나의 아라비아의 환상은 사막 저 멀리의 신기루 같았다.

그러나, 아라비아는 있었다. 없는 것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 한 구석에 중세의 아라비아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아 북 예멘의 수도 싸나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아라비아의 지붕이라 불리는 해발 2,300미터의 산악 고원지대로 깊숙이 들어갔던 비행기가 마치 나를 먼 유배지에 내려주듯 하고 가버린, 그래서 처음 트랩을 내렸을 때의 풍경이 한없이 황량하고 쓸쓸해 보이던 그 오지의 땅이 바로 중세의 아라비아였던 것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과거의 세계로 온 느낌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아버지가 9개월을 머물렀던 이곳 코르도바의 주소와 시내지도를 챙겼다. 나는 라니아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코르도바로 주거를 옮겨왔고 아버지가 싸나에서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곧바로 이곳으로 라니아를 찾아왔었다고 추정했다. 처음 아버지가 코르도바에 장기체류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코르도바란 역사적인 도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코르도바에는 지금도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문화가 공존하고 있고, 구시가지에는 이슬람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도 있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으로부터 주소지를 찾아가는 설명을 충분히 듣고 나서야 호텔을 나왔다. 여기에서 멀지 않는 곳에 라니아가 있다. 내 마음은 벌써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골목을 몇 번씩 이리저리 돌아 찾아낸 집은 조그만 철문이 있는 하얀 벽돌 2층 집이었다. 아치형의 열려 있는 그 집 문으로 그냥 쑥 들어서니 조그만 마당이 있었다. 나는 그 마당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50대로 보이는 약간 퉁퉁한 여자가 나오다가 멈칫하며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그 여자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고, 아버지 사진을 내밀며 이런 사람이 13년 전에 이곳에 살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사진을 한참 보더니 다시 나와 사진을 몇 번씩이이나 번갈아 유심히 보았다. 나는 바짝 긴장하여 그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집안에는 80이 넘어 보이는 머리가 듬성듬성 빠진 노인이 있었다. 여자가 노인에게 뭐라고 말하자 노인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홍차를 내어온 여자는 나를 찬찬히 다시 보더니 세뇨르 김과 내가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행적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나를 남겨두고 다른 방으로 갔다. 여자가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전화를 했다. 20여 분도 더 지났을까, 여자는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나를 안내할 곳이 있다고 했다. 집을 나와서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비슷비슷한 골목길을 6-7분쯤 이리저리 돌아가더니 여기서부터 이슬람 지구라 했다. 드디어 라니아를 만나는 것일까. 나는 이제 곧 보게 될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야릇한 기분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라니아의 첫 모습을 대했을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예멘에 직물을 수출하기 시작하고 예멘 정부의 비공개 군장비입찰정보를 입수하면서부터 예멘출장이 잦아졌다. 직물 비즈니스는 주로 홍해입구에 있는 항구 호데이다에서 했고, 정부 비즈니스는 수도인 싸나에서 했다. 따라서 예멘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 먼저 호데이다로 가서 직물상담을 하고 싸나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여름철이었다. 호데이다에서 일을 보고 싸나로 가기 위해 택시로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한 3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지독한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금새 2-3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철에 이런 바람이 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기사는 그대로 차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다행히 바람이 그치고 기사는 차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가 보닛을 열고 무언가 만지작거리고 했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는 길이라 난감한 마음으로 차에 앉아 있었다. 별안간, 밖에서 서성거리던 기사가 지나가는 차를 잡아놓고 나를 빨리 나오라고 손짓했다. 하얀 벤츠가 서 있었다.

얼른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 옆에 타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뒷좌석으로 얼굴을 향했다. 순간, 화려한 베일을 쓴 여인의 모습이 내 눈에 가득히 들어오면서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듯한 찌릿한 감각이 온몸에 일시에 퍼졌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나를 쏘아보는 듯한 크고 검은 눈의 강렬한 눈빛이 조용히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로마 검투사의 투구 같은 특이한 모양의 히잡은, 이마를 가린 검은 천이 코와 입으로 내려와 귀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마, 코와 입을 가린 천의 가장 자리는 금실과 붉은 실 그리고 초록 실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아져 있었다.

하얀 돔의 첨탑 속 아라비아 공주를 떠올렸다. 지체 높은 집안의 딸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조금 전에 본 여인의 얼굴로 차 있었고, 울렁거리는 가슴은 조금도 진정될 줄 몰랐다. 젊은 아라비아 여인과 이렇게 가까이 자리를 같이 해 본적도 없었지만, 또 저렇게 성장을 한 미인을 본적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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