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M&A와 채권단의 자가당착

더벨 황철 기자 | 2010.11.26 11:45

[thebell note]

더벨|이 기사는 11월25일(08:25) 머니투데이가 만든 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선의후리(先義後利)'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순자는 "이익을 좇기 전에 의를 먼저 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시대 개성상인들은 이 말을 거상이 갖춰야 할 최고 덕목으로 삼았다. 요즘도 기업가 정신을 논할 때마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문구다.

원론적으로 인의를 앞세운 상도덕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언행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자기규율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최근 현대그룹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바로 선의후리다. 바로 외환은행 등 채권금융기관이 보인 이중적 태도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올해 자본시장의 빅 이슈를 몰고 다녔다. 재계에서 유례없이 재무개선약정을 거부하며 이단아를 자처했다. 최근에는M&A시장 초대형 매물인 현대건설 인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안은 달랐지만 대화상대방은 동일했다. 외환은행 등 채권단은 최근까지 재무개선약정 체결을 두고 현대그룹과 공방을 벌였다. 현대건설 M&A에서는 매각 주체로 반대편 테이블에 앉았다.

입장에 따라 태도 또한 사뭇 달랐다. 현대그룹 부실을 우려해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던 몇 달 전의 모습은 M&A협상 과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시장의 예상을 1조원 이상 웃도는 자금을 얹어주겠다는 현대그룹의 손을 번쩍 들어줬다.

우선협상자 선정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M&A 자체가 종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 인수·합병의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는 것은 성급한 측면이 있다.

다만 은행들이 편의적 잣대로 기업을 대하는 모순된 태도만은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채권단은 현대그룹 재무구조의 취약성을 역설하며 MOU 체결을 종용했다. 수익성 저하와 높은 차입 비중으로 신용위험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조원의 외부조달을 감당할 수 있는 인수주체로서 신인도를 인정해 줬다. 비가격 요소 평가까지 마쳤다고 하니 향후 기업 가치 하락 우려도 크지 않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그러면 현대그룹의 재무구조에 획기적 변화라도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기존 입장을 뒤바꿀 만큼 탁월한 재무개선 효과를 M&A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건설 인수의 장기적 비전을 받아들이더라도 당장 재무적 부담이 커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신용위험을 우려해 재무개선약정을 유도하던 채권단이 구조조정은커녕 대규모 차입 인수를 허용하겠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다.

채권단의 엇갈린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끝나자마자 '현대그룹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은 진행형'이라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일련의 상황을 봐서는 현대건설 M&A 완료 때까지 시간을 끌다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채권단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비판은 면하기 어렵게 됐다.

물론 은행도 할 말은 있다. 채권자와 주주의 지위는 엄연히 다르다. 주주로서 이익을 극대화는 것은 시장 논리와 맞아 떨어진다.

또 현대그룹·현대건설 채권단 안에는 양쪽에 중복되지 않은 구성원이 존재한다. 이들의 이윤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 또한 간사 은행의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대주주 정책금융공사는 물론 은행의 공적 성격을 감안할 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특히 현대그룹 사태로 재무개선약정 제도에 대한 실효성 논란이 불거진 상태에서 채권금융기관의 이같은 행보는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利)를 쫓기 전에 언행일치의 의(義)를 먼저 생각했다면 적어도 자기모순에 대한 비판 정도는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선의후리(先義後利)의 정신이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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