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에세이]눈사람 실종사건

머니투데이 김영권 머니위크 편집국장 | 2010.01.26 09:57

눈사람은 눈을 반기는 사람 곁에만 있다

한겨울에 눈사람이 사라졌다. 눈사람 실종사건이다. 지구가 열병에 걸려 눈 대신 비만 내린 것도 아니다. 이상 한파가 닥쳐 눈은 오지 않고 겁나게 춥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눈이야 펑펑 왔다. 질리게 왔다. 그렇다면 눈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눈 속에 파묻힌 것일까?

눈이 와도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원 아니면 집에 콕 박혀 있다. 어른들은 온통 짜증뿐이다. 남의 얘기를 빌릴 필요가 없다. 악몽의 새해 첫출근길, 아침 7시15분에 집을 나서 11시15분에 회사에 도착했다. 평촌에서 광화문까지 4시간. 갑작스런 폭설에 남태령 고개가 통제됐고, 차들은 눈에 갇혀 오도가도 못했다. 나는 고속도로 쪽으로 우회한 버스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솔직히 볼 일도 봐야겠는데 고속도로에 내릴 수도 없고 이런 낭패가.

그날 뉴스는 요란했다. 대충 읊어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눈폭탄, 사상 최악의 폭설, 대폭설 재난, 도심 하루 종일 마비, 하얗게 질린 도시, 길거리 거대한 주차장, 공항 전편 결항, 103년 기상관측사 기록 경신, 지하철 정전, 지하철이 지옥철, 무더기 지각사태, 국무회의도 지연, 비닐하우스 폭삭, 내 농사 망했어요, 제설전쟁, 빙판사고, 교통사고, 부상자 속출, 지붕의 눈 치우다 떨어져 사망, 산간마을 눈에 고립 등등.

이렇게 한참 야단법석 떠는 걸 보니 어쩐지 내 고생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 탓을 해도 눈은 묵묵부답이다. 뭔가 부족하다. 좀더 깐깐하게 책임을 따지고 물어야 한다. 기상청 눈 조금 온다더니 또 틀렸다. 슈퍼컴퓨터 왜 샀나. 서울시 제설대책 주먹구구. 지하철 운행 관리 완전 엉망. 시민정신 어디갔나, 제집 앞 눈도 안치운다 등등.

이제 기분이 좀 풀린다. 화풀이는 이쯤하고 차분하게 폭설의 원인을 짚어보자. 올해는 시베리아에 눈이 많이 왔고 그 눈이 햇빛을 반사해서 냉기가 커졌는데 마침 남쪽에서 제트기류를 탄 저기압이 지나가다 서로 부딪쳐서 큰 눈을 만들었다. 중국 내륙의 북서 한랭전선이 발달해 겨울 황사까지 몰고 오다 서해바다의 따뜻한 수증기를 만나 큰 눈이 됐다.

설명이야 항상 논리정연하다. 같은 방식으로 시베리아에 왜 눈이 많이 왔고, 중국 내륙에 왜 한랭전선이 발달했는지도 풀이하면 지적 만족감이 충족되려나. 요즘에는 미니빙하기 도래설까지 등장했다. 기상학자들이 뒤늦게 제철을 만난 것같다.

그렇다면 눈사람 실종사건에 대해서도 과학수사를 해보자. 우선 예비문제. 폭설대란 와중에 도심 고갯길에 스노보드족과 스키족이 출현했다. 이 별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그날 뉴스에 있다. '대단히 위험하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도로교통법 위반이고, 범칙금이 부과된다.'

같은 맥락에서 눈사람 실종사건은 도무지 사건이 아니다. 그건 전혀 위험하지 않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누구도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법으로 걸 게 없다. 그걸 사건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문명의 병이 깊어 감성이 메말라버렸다. 순백의 눈도, 그 눈을 바라보는 마음도 첨단 도시 문명에 오염돼 버렸다. 눈은 문명의 불청객일 뿐이다.


나는 꿈을 꾼다. 깊은 산 속 오두막집, 사랑하는 사람과 눈 속에 갇혔다. 집 안에는 요리할 것, 마실 것, 읽을 것, 들을 것이 충분하고 땔감도 넉넉히 쌓여 있다. 문 밖에서는 눈사람이 웃음짓는다. 세상은 눈으로 가득하다. 눈의 나라, 설국에서 나는 행복하다. 눈은 쉬지 않고 내린다. 나는 눈에 감동한다. 그 눈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아름다운 눈이다.

눈사람은 눈을 반기는 사람 곁에만 있다. 올 겨울, 그 눈사람이 사라졌다.

  ☞웰빙노트

빠빠라기(문명인)는 고등처럼 딱딱한 껍데기 속에 산다. 용암이 갈라진 틈에 사는 지네처럼, 그들은 돌과 돌 사이에 산다. 머리 위도, 발밑도, 몸 주위도 온통 돌투성이다. 빠빠라기의 오두막은 네모난 상자 꼴이고,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 돌 상자에는 많은 서랍이 달려 있고 여기 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그러니까 이상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이 상자 안에서 죽어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어째서 새가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같으면, 날개가 돋아나 바람과 태양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르기를 간절히 바랄 텐데. 빠바라기는 자신들의 돌 상자를 사랑하며, 그것이 해롭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이제까지 말한 것 전부, 많은 사람이 사는 돌로 만든 상자, 무수한 강처럼 여기저기로 통하는 높은 돌이 갈라진 틈, 그 가운데의 사람 무리, 시끄러운 소음과 대소동, 모든 것에 내리 쏟아지는 검은 모래와 연기,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하늘의 푸른 빛도 없고 맑은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는 곳, 이것을 빠빠라기는 <도시>라고 부르며, 자신들이 그것을 창조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처음으로 문명을 본 티아베아 섬마을 추장 투이아비 연설집 / 에리히 쇼이어만 엮음, 빠빠라기>

우리는 거리에 있지 않고 창 안에 있습니다. 방 안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거나 눈이 내리는 동안 사무실 안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 온다고 창밖으로 달려가지 않고 눈을 몰고 다니는 바람의 찬 기운이 새어들어 올까봐 창문을 꼭꼭 닫고 있습니다. 눈 그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눈이 온 풍경을 즐길 뿐입니다. 그 배경 위에 내가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눈을 좋아하고 바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눈이 내게 고통을 주거나 불편하게 하면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도종환,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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