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리딩뱅크 만들자" 10년만에 '빅뱅'

머니투데이 반준환 기자, 정진우 기자 | 2010.01.01 08:03

[도약 2010] 은행권 지각변동 오나(상)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외환위기 이전 시중은행 가운데 규모가 큰 은행들을 지칭한 말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이름들은 모두 사라졌다.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을 겪으며 지방은행을 포함해 30여곳에 달하던 은행은 이제 10여개로 줄어들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해 국민은행이 만들어졌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한빛은행을 거쳐 우리은행으로 합쳐졌다. 서울은행은 하나은행에,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에 인수됐다. 현재 은행권 '빅4'가 형성된 과정이다.

2010년. 은행권에서 10년 만에 새로운 '빅뱅'이 예고됐다. 은행들이 국가 경제규모에 상응하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인식에서다. 기업부문에선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LG전자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글로벌 플레이어가 나왔으나 은행들은 이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 국내보다 외국계 은행을 활용하는 기업이 적잖다. 국내 최대인 국민은행의 자산규모는 세계 74위에 그친다. 당장 우리금융지주,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민영화에 참여할 금융자본도 국내에는 변변히 없다.

경제규모 10위권이라는 한국의 금융 현주소다. 은행간 '출혈경쟁'이라는 고질도 빅뱅 논의를 부추긴다. '빅4'라는 거창한 용어 뒤에 정작 경쟁력을 지닌 강자가 없다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얘기다. 제대로 된 리딩뱅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10년간 유지된 현 구도로는 은행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긴 어렵다"며 "현재의 고비용·저수익구조에서 벗어나려면 은행간 M&A 등 한 차례 빅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금융 민영화, 은행 재편의 핵=은행권의 빅뱅은 현재 속도를 높이는 우리금융 민영화를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우리금융은 현재 예금보험공사가 보유한 지분매각을 통해 민영화 수순을 밟고 있다. 예보의 우리금융 지분은 경영권이 붙은 '50%+1'주와 나머지 소수 지분 16% 등 총 66%다.

우리금융은 민영화를 위해 올 초 소수지분의 절반인 8%를 자사주로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소수 지분 부담이 줄어들면 예보가 지배지분(50%+1주)을 매각하는 것도 쉬워진다.

지배지분 매각은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으나 다른 금융지주와 합병하는 방식이 유력한 상태다. 금융당국도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 당시 우리금융 민영화 해법의 하나로 '합병'을 명시했다. 금융시장에선 우리금융을 인수할 만한 토종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해외 금융기관에 무리하게 매각하기보다 국내 금융기관끼리 짝짓기를 해 경쟁력을 높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주식교환(스와프)을 통하면 자금부담도 크지 않다.

우리금융이 합병을 통해 민영화를 추진하는 경우 KB금융, 신한지주, 하나금융지주 3곳의 금융지주가 모두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이 가운데 시너지가 높은 곳으로 가계금융에 특화된 KB금융과 하나금융이 꼽힌다. 우리금융은 전통적으로 기업고객의 비중이 크고, 투자은행(IB)업무 노하우가 상대적으로 축적돼 있다. 이를 가계금융과 결합하면 서로가 윈윈하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KB금융은 그러나 외환은행 인수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고, 신한지주는 합병의지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금융과 하나금융의 짝짓기 가능성이 높다. 실제 빅4 경쟁에서 뒤처진 하나금융도 우리금융과 합병을 대안으로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규모 328조원인 우리금융은 하나금융(179조원)과 덩치를 맞추기 위해 경남은행, 광주은행, 우리투자증권 등을 분리매각할 수도 있다. 한편에선 포스코나 KT 등 공공성이 강한 산업자본과 국민연금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분을 5~10%씩 사들이고 경영권을 포함한 잔여 지분만 하나금융이 인수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우리금융과 하나금융이 계열사 매각없이 합병할 경우 자산총액이 507조원에 달하는 '메가뱅크'가 탄생한다. KB금융(331조원)이나 신한지주(311조)를 압도하는 규모다. 이 경우 은행권은 '1강2중'의 새로운 구도로 재편된다.

◇외환은행 어디로=우리금융 민영화와 함께 관심을 끄는 곳은 외환은행이다. 최대주주인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올해 매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수후보로는 산업은행, 하나금융, 농협 등이 꼽히나 시장에서는 KB금융에 무게를 둔다. 강정원 국민은행장도 수차례 "외환은행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인수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가계금융에 특화된 국민은행과 기업금융 및 외환업무에 강점을 지닌 외환은행이 결합하면 시너지를 높일 수 있다는 점도 이런 시나리오의 근거가 된다. KB금융은 국내 은행계 지주회사중 거의 유일하게 M&A 여력이 있는 상태다. 자금여력은 자사주(3조원)를 포함해 총 4조원 규모다.

KB금융이 자산규모 112조원인 외환은행을 인수하면 외형이 440조원을 웃돈다. '우리금융+하나금융'을 견제할 수 있는 조합이다. 특히 양사는 중복고객이 거의 없어 합병에 따른 자산축소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분석된다. KB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경우 금융계는 우리+하나, KB+외환, 신한지주 등 자연스레 1~3위 구도가 만들어진다.

산업은행 민영화는 이런 예상의 변수로 꼽힌다. 산은은 외환은행을 놓고 KB금융과 경쟁할 수 있다. 산은은 수신기반이 취약해 이를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외환은행 인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정책금융공사와 분리돼 출범한 산은금융지주에 속한 산업은행은 상업투자은행(CIB)을 지향한다. 수신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소매영업에도 나서야 한다. 지점 숫자가 턱없이 적어 M&A가 불가피한 처지다. 외환은행이 KB금융에 매각된다면 산업은행은 해외에서 파트너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 외환은행을 놓고 국내 금융기관끼리 경쟁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는 터다.

◇은행 M&A 득실은=금융지주, 은행간 짝짓기는 은행의 고비용-저효율구조를 해소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무엇보다 출혈경쟁에 따른 부작용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와 관련해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이렇다할 리딩뱅크가 없다보니 은행들이 동일할 상품을 놓고 지나친 경쟁을 벌여 수익성이 좋지 못하다"며 "은행간 합병이 이뤄지면 저원가성 예금조달이 가능해지고 내실경영에 주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 수익성 지표인 순이자마진(NIM)을 보면 국내 은행들의 경쟁 실상을 가늠할 수 있다. 지난해 상반기 국내은행들의 순이자마진은 2% 밑으로 추락했다. 반면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씨티,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간체이스, 웰스파고 4대 은행의 평균 NIM은 1분기 3.20%, 2분기 3.42% 등으로 한국보다 1.5%포인트가량 높았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보다 국내은행들의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은 큰 문제"라며 "해외은행들의 NIM이 크게 하락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는 5% 이상인 곳이 대부분이었다"고 지적했다.

은행권 빅뱅은 국내은행들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돼온 중복점포, 과당인력 해소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은행들은 지난해 9월말 현재 7357곳의 점포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유럽 등의 은행과 비교하면 동일면적당 점포수가 2배 이상 많다.

금융계 관계자는 "국내은행들은 영업점에 과도한 인력을 배치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기능을 키워야 하는 본점에서는 후선업무밖에 하지 못한다"며 "은행점포가 한 블록에 몇 개씩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은행 재편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무리한 짝짓기는 시너지효과를 제대로 낼 수 없는데다 '승자의 저주'라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이중 금융지주·은행간 합병으로 중복고객이 이탈하면 기대만큼 시너지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게 큰 문제다. 잘못된 합병은 서로의 파이를 갉아먹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신한은행은 2006년 조흥은행을 인수하면서 중복고객 문제를 겪었고, 뒤이어 LG카드와 신한카드의 합병에서도 고객 이탈이 있었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황재균과 이혼설' 지연, 결혼반지 뺐다…3개월 만에 유튜브 복귀
  2. 2 "밥 먹자" 기내식 뜯었다가 "꺄악"…'살아있는' 생쥐 나와 비상 착륙
  3. 3 1년 전 문 닫은 동물원서 사육사 시신 발견…옆엔 냄비와 옷이
  4. 4 "연예인 아니세요?" 묻더니…노홍철이 장거리 비행서 겪은 황당한 일
  5. 5 박수홍 아내 "악플러, 잡고 보니 형수 절친…600만원 벌금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