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갖춰 대접하겠다는 약속은 현실 앞에 무력하다. 앞선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보인다는 생각이 강하다. 막후에서 여전히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선대'를 견제해야 한다는 의식도 작용한다.
정권교체기에는 더 그렇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사이가 그렇다. 물고 물리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16일 한나라당에선 모처럼 흐뭇한 풍경이 벌어졌다. 이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 정몽준 대표와 박희태 전 대표가 나란히 앉았다.
전날 정 대표는 취임 100일을 맞았다. 박 전 대표가 지난 9월 경북 양산 재선거를 위해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정 대표는 대표직을 자동승계받았다.
정 대표는 "대표에 취임한 지 어제로 100일을 맞았다"며 "그동안 성원해준 당원과 최고위원, 중진 의원들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덕담이었다. 인사치레로 넘길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이 말을 받았다. 박 전 대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제가 대표직을 그만 둔 지가 꼭 100일이 됐다"고 말했다. 폭소가 터졌다. 여야 예산안 대치 정국을 질타하던 냉랭한 분위기에도 온기가 돌았다.
박 전 대표는 이어 "그동안 정 대표가 여러 난제를 풀고 각고의 노력을 해 당 지지도가 많이 올라갔다"며 "정 대표의 지도력이나 경륜이 국민의 마음속에 녹아내리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고 덕담을 했다.
한 당직자는 "박 전 대표다운 농"이라고 말했다.
앞서 박 전 대표는 지난달에도 전직과 현직을 빗댄 '박희태식 유머'를 선보였다. 세종시 수정 문제로 박근혜 전 대표의 입에 한창 이목이 쏠려 있을 때였다. 마침 국회 본회의가 열렸고 기자들은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한마디를 듣기 위해 본회의장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본회의장으로 걸어오자 기자들이 일제히 몰렸다. 본회의장 문 앞이 꽉 차면서 본회의장에 들어가려는 다른 의원들은 잠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때 "나도 똑같은 박 전 대표인데 난 왜 이리 인기가 없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박희태 전 대표였다. 폭소가 터졌고 박근혜 전 대표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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