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와 예능사이' 방황하는 한국 정치

머니투데이 이승제 기자 | 2009.11.23 14:42

[이기자의 '정치야놀자']

한국 정치는 다큐(다큐멘터리)일까, 예능일까.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이 속에 한국 정치의 실상을 이해할 열쇠가 숨어 있다.

#TV 속 세상은 그야말로 예능 전성시대다. 온 국민이 '1박2일', '무한도전', '패밀리가 떴다' 등 예능 프로그램에 푹 빠져 있다. '예능인'이란 단어는 이제 배우, 가수 등을 아우르며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대표 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다큐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극적인 허구성 없이 사실적으로 펼쳐보인다. 예능은 재주와 기능을 뜻하는데, 애초 각종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다큐는 딱딱하지만(물론 내셔널지오그래픽 매니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예능은 말랑말랑하다. 다큐는 잘 짜여진 대본에 따라 진행되지만 예능 프로그램은(적어도 한국의 경우) 순간의 재치와 유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요즘 TV 속 예능인들은 △애드립을 얼마나 잘 하는지, △얼마나 자신을 스스로 낮출 수 있는지 △시쳇말로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에 따라 능력을 평가받는다. '짱돌' 강호동, '허당' 이승기 등이 그렇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지니고 있고 "너 돌대가리냐"는 말에 목숨 걸고 싸우던 국민들이 이제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의 프로그램에 열광하고 있다 .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최근의 예능 프로그램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문화적 창조물일 수 없다. 외부에서 갑작스레 수입된(이식된) 것이라면 그렇게 빠르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 수 없다.

우리는 '국민MC', '국민요정' 등이 등장해 순간순간 망가질수록 즐거움을 느낀다. 틈 날 때마다 터져나오는 애드립에 박장대소한다. 그런 애드립의 핵심은 자신이나 다른 예능인을 갑자기 당황스럽게 만드는 '희화화'에 있다.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 망가지는 모습 속에서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속 시원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카타르시스(대리만족)의 극대화. 바로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과거 속에서 한 단어를 끄집어낼 수 있다. 바로 '마당극'. 답답하게 강제된 유교질서 속에서 마당극은 훌륭한 해소통로였다. 선조들은 마당에서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걸쭉한 농담과 직설적인 표현에 매료됐다. 양반들의 가식이 희화화의 과정을 거쳐 폭로되는 순간 답답했던 가슴을 잠시 풀어헤쳤다. 마당극은 헐리우드식 초대형 블록버스터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잔잔하지만 가슴 뭉클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은 전파를 타고 다가오는 현대판 마당극인 셈이다.

#2009년 한국 여의도 정치권. "정치인은 연예인과 마찬가지다.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이 오간다. "국회의원은 4년에 한번씩 사업갱신을 해야 하는 벤처사업가"라는 한 초선의원의 말은 씁쓸한 웃음 속으로 잦아든다.

정치인들의 말과 행보 뒤에는 통상 치밀하고 철저한 계산이 놓여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사뭇 다르다. 인기(표심)을 좇아야 하는 정치인들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여론을 따라잡는 임기응변(예능)을 즐겨 사용한다. 사전에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다큐)만으론 부족하기 때문.

한국 정치인들은 다큐와 예능 사이에서 늘 고민스럽다. 한국 정치인 중에는 뛰어난 예능자질을 보여주는 이들이 많다. 순간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때로 기지를 발휘하고 때로 기발한 승부수를 던지곤 한다.

하지만 정치는 다큐를 기본 속성으로 갖는다. 원칙, 철학, 비전의 영역에 속한다. 세종시, 4대강, 미디어법 등을 놓고 벌어지는 첨예한 여야 갈등은 정치의 다큐적 냉정함을 느끼게 한다.

다큐와 예능의 적절한 조화 속에서 정치는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다큐의 진정성과 예능의 카타르시스…. 양쪽의 장점을 취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다큐의 삭막함과 예능의 무절제함이 결합되고 이것이 정치 영역에서 벌어진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질 뿐이다. 문뜩 '정치인들은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할까, 그렇다면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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