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는 기술 집약 제품의 경우 소비자가 통상적인 방법에 따라 복잡한 기계를 사용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기계에 하자가 있었는지 여부는 판매자가 입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급발진 사고에 대한 종전 판례가 급발진 현상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원인을 운전자의 오조작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고 이런 전제에서 급발진으로 인한 형사사건에서도 운전자의 과실 책임을 인정해 온 터여서 이번 판결은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물론 대법원이 지난해 대리운전기사가 대리운전을 하던 중 일방통행도로를 역주행해 1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당한 사고에서 대리운전기사의 과실이 아닌 차량의 결함을 원인을 이유로 대리운전기사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형사사건에서 급발진으로 인한 사고에 있어서 자동차의 결함을 인정한 바 있지만 사고원인에 대한 규명 책임을 제조사에 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가정을 하게 됐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피고인 수입자동차 수입판매사와 제조사 중 수입판매사에 대해서만 책임을 인정했다. 원고는 민법상 매도인의 하자담보책임을 주장했는데 재판부는 제조사가 매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조사에 대한 청구를 기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원고가 제조사에 대해 하자담보책임 외에 다른 책임(불법행위책임, 제조물책임) 등을 주장했더라면 재판부가 제조사에게도 손해배상책임을 물었을까.
또 만약 급발진의 원인이 확인된다면 그 부품을 제조한 제조업체(예를 들면 자동차 제조사와 대등한 관계를 가지는 세계적인 부품제조사)와의 소송결과는 어떻게 될까. 이번 사건은 독일 M사 자동차인데 만약 국내의 현대, 기아의 자동차라면 재판부가 어떤 판결을 했을까.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경우 앞으로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사가 자동차의 결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거나 운전자의 과실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사고로 인한 책임을 부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제조사의 회계장부에 급발진 사고로 인한 보상항목이 새롭게 등장할 수도 있다. 물론 아직은 무시할만한 금액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최근 기업이 수집한 고객의 정보가 유출됨으로써 기업이 고객들에게 배상해야 하는 손해액의 규모를 고려할 때 자동차 제조사나 판매사에서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우리는 대기업과의 싸움에서 만신창이가 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부와 권력은 물론 전문성까지 갖춘 대기업을 상대로 서민들이 소송을 진행해 억울함을 명명백백히 밝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상대 기업의 심각한 흠결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소비자들의 주장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 판결의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자동차 제조사나 판매사가 앞으로 급발진 원인을 규명하고 예방책을 강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곧 소비자들에게 큰 혜택이 될 것이다. 단순히 보면 숱한 법원 판결 중 하나지만 곱씹어보면 이번 판결이 미치는 영향과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상급심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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