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한 누리꾼, 수사-후원-감시까지 '대단'

머니투데이 신희은 기자 | 2009.10.01 17:04
↑ 지난 8월 서울 어린이대공원 '2009 음악축제'에서 유진 박을 응원하는 누리꾼의 모습.

#1. 최근 인터넷은 '아동 성범죄자 처벌 강화' 논란으로 뜨겁다. KBS '시사기획 쌈'에 소개된 '나영이 사건'이 발단이 됐다. 지난해 말 조모(57)씨는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나영(9·가명)양을 성폭행해 누리꾼의 공분을 샀다.

누리꾼은 "피해자는 대장, 항문과 성기 80%가 영구소실돼 평생의 멍에가 됐는데 범인에 고작 12년형 선고냐"며 분노했다. 누리꾼 30여만 명은 아동 성범죄자의 처벌강화를 촉구하는 인터넷 청원을 벌였다. 후원의사를 밝히거나 촛불집회도 제안됐다.

나영양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까지 "반인륜적 범죄에 참담하다"고 언급할 정도로 이슈로 부상했다. 누리꾼은 이 사건 재심, 아동성폭행 및 유괴 특별법 제정, 국민참여재판 강화 등 법적 개선까지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2. 7월 말 '처참한 유진 박'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됐다. 전기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의 근황이 수상하다는 제보도 잇따랐다. 유진 박 소속사 매니저는 뒤늦게 "유진이 10개월 동안 감금당하고 5억 원을 갈취 당했다"고 해명했다.

누리꾼 2만3000여 명은 '유진 박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연합' 카페를 개설해 구명에 나섰다. 카페 운영진은 법률자문, 자료수집, 홍보 등 세부담당을 나눠 활동 중이다. 일부 회원은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인 유진 박을 직접 방문키도 했다. 미국, 이탈리아 등 해외공연 섭외까지 시도해 전문 매니저 못지않은 지원을 하고 있다.

누리꾼의 끈질긴 문제제기는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재미교포 제시카 차, 김을동 한나라당 의원, 박찬종 변호사 등도 유진 박을 돕겠다고 나섰다. 관심에 힘입어 한 출판사는 1999년에 나온 책 '유진박 질주'를 10월 초 재출간할 예정이다.
↑ 이른바 '나영이(가명) 사건'과 관련해 아동 성범죄자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누리꾼의 청원운동.


이 같은 한국 누리꾼의 위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묻혔던 사건도 단 몇 시간 만에 이슈로 부상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관련 정보를 속속들이 찾아내 경찰을 뛰어넘는 수사력을 자랑한다. 필요하면 시민단체, 정부기관, 사법기관을 움직이고 피해자 보호와 금전적 지원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 20~30대 누리꾼 '냄비' 아니야

누리꾼은 더 이상 10대 청소년 위주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나영이 사건은 아이를 가진 부모를 중심으로, 유진 박의 경우는 그의 첫 한국 공연을 기억하는 20~30대 직장인을 중심으로 관심이 뜨겁다. 활동 양상도 이미 '냄비' 수준을 뛰어 넘었다.

유진 박을 응원하는 한 누리꾼은 "이 사건을 재능 있는 음악가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엔터테인먼트 시장구조의 문제로 본다"며 "유진 박 문제의 단기적인 해결보다는 그가 음악적 재능과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때까지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영양 관련 청원 운동 중인 누리꾼도 "아동 성범죄자 처벌과 신원공개가 미비한 실태를 알리고 인권위, 정치권, 사법부에 호소해 법 개정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언급했다. 실제 법 개정 논의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같은 누리꾼의 진화는 '집단지성', '웹 2.0 세대의 저력'이라 불린다. 누리꾼이 사회 의제를 설정하고 여론을 주도, 법·제도 개선까지 이끌어내는 '전천후 멀티플레이어'로 부상했다는 것. 이는 IT 강국 한국의 원동력이자 산물이다.

◇ 사생활 침해, 무죄추정원칙 훼손 우려 낳아
그러나 이 같은 누리꾼의 진화는 심각한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특정 이슈에 지나치게 조직적·적극적으로 대응하다보니 피해자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혐의가 입증되지 않은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례로 나영양의 거주지역 안산시청에 누리꾼의 후원 문의가 쇄도하자 피해자 가족은 "정중히 사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어린 자녀에 쏟아지는 관심이 혹여 이중의 상처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 것.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이번 사건을 '나영이 사건'이라 부르지 말자는 제안이 제기될 정도다.

유진 박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 소속사 대표 김모 씨의 유죄가 입증되기도 전에 누리꾼에 의해 김 씨의 사진, 이름 등 개인정보가 유출된 바 있다. 명확한 증거 없이 인터넷 상에 특정 인물에 대한 악성댓글, 비방이 이어져 개인의 명예훼손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했다.

'누리꾼의 힘'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으려면 개인 사생활에 대한 보호와 피의자 무죄추정원칙에 대한 존중은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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