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친다면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모두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 투자손실과 관련해 최근 당국의 징계를 받은 탓이다. 박 전 이사장은 이미 사의를 표명한 터. 자연스레 황 회장에게 거취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황 회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상가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실례라고 했다. 다만 사상 초유의 중징계를 받은 자신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론스타를 둘러싼 '먹튀' 논란이 소재였다.
그는 "누군가 외환은행에 대해 '먹튀(먹고 튀었다는 의미)'라는 프레임을 걸어 놓자 그 틀에 갇히게 됐다"면서 "과연 먹튀인가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돌리진 못했다"고 했다. 이어 "이미 '먹튀'의 덫에 걸렸고, 덫에 한 번 걸리면 흔들수록(움직일수록) 덫은 더 세진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번 금융위기 '쓰나미'는 파생상품을 투자한 우리은행만 할퀴고 갔을까. 정도의 크기가 달랐다 뿐이지 상처를 입지 않은 은행은 거의 없다. 지난 1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하나은행은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를 팔았다 적자를 내면서 휘청거렸다. 조선사 선수금환급보증(RG) 문제로 신한은행은 소송 시비에 휘말렸다. 국민은행도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뱅크(BCC)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은행이 대규모 손실을 본 부채담보부증권(CDO)이나 키코, RG 등은 모두 위기 전에 이뤄졌던 거래다. 은행들은 일상적 상황에 맞춰 투자를 했다가 결과적으로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셈이 됐다.
한 은행 임원은 "사후적으로 '누가 투자를 지시했고, 뭘 시켰냐'는 감정적인 얘기"라면서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시인했다. 특정인에 '덫'을 씌우기보다 지난 1년 동안의 경험을 밑거름 삼는 게 금융업 발전에 훨씬 이롭단 얘기다. 금융당국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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