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1년, 현장 비사] "얼마면 되겠소?"

뉴욕=김준형 특파원 | 2009.09.15 07:01

위기의 한국경제, 격동의 뉴욕 45일(하)

편집자주 | 리먼브러더스 붕괴이후 국제금융 시장에서 한국경제는 풍전등화의 위기로 치달았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넘긴 내성과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 등의 방호벽에도 불구, 글로벌 시스템의 한 축인 이상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머니투데이는 그 날의 쇼크이후 전환의 계기가 된 한미 통화스왑까지 45일간의 피말랐던 격동의 순간을 상, 하 2회에 걸쳐 재구성했다.리먼 파산을 맞아 위기의 중심 뉴욕에서 펼쳐졌던 한국 관계당국자들의 좌절과 대응 등에 대한 첫 현장 기록이다.

('상편'에 이어)

2008년 10월 2일 오전 10시 미국 뉴욕 맨해튼 남단, 월가 중심부에 자리잡은 뉴욕 연방은행.
13층 뉴욕연방은행의 윌리엄 더들리 금융시장국(Market Group) 담당 수석부총재(현 뉴욕 연방은행 총재) 사무실에서 더들리 부총재와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의 윤용진 부국장(외화자산 운용 데스크)이 마주앉았다.

↑맨해튼에 자리잡은 뉴욕 연방은행 본부 건물. 리먼브러더스 등 부실금융기관 처리, 한국을 포함한 중앙은행들과의 통화스왑 등 금융위기 대처를 위한 주요 결정들이 이곳에서 이뤄졌다.[사진=뉴욕 연방은행]
더들리 부총재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미 금융시장에서 미 국채와 국영모기지 업체 채권을 매각하고 리포(Repo:환매조건부 채권)거래 잔액을 대규모로 줄이고 있는데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채권값이 떨어지고 리포시장이 냉각돼 신용경색이 극도로 악화돼가는 상황이었다.
한은측에서는 달러 유동성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통화스왑 확대국에 한국을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 금융기관의 자금조달이 그렇게 어려운 상태인가. 스프레드(가산금리) 같은 구체적인 자료를 보내달라"
"지금 스프레드가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에겐 백스톱(back-stop:방어벽)이 필요하다. 호주달러의 하루 거래는 80억달러이고, 원/달러는 100억달러가 넘는다. 아시아국가로 유동성 위기가 확대되고 있는데 통화스왑을 유럽계 국가하고만 한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월가를 관할하고 있는 뉴욕 연방은행, 그중에서도 금융시장국은 미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시장 대책을 수립하는 기구이다. 사상 최대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금융시장국은 여전히 전시 최고 작전통제소인 '워 룸(War Room)'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윌리엄 더들리 뉴욕연방은행 총재. 리먼 사태 당시 금융시장국을 책임지는 수석부총재로 해외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왑 계약 당사자였다.
더들리 수석부총재는 3월 베어스턴스 사태 이후 주말을 거의 쉬어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뉴저지주 트렌턴시 집까지 기차로 1시간 30분 통근했던 그는 주중에도 밤 12시가 넘어 시장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콜택시로 퇴근하거나 아예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야전 사령군이다.
세계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왑 체결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의 공개시장위원회(FOMC)의결사항이지만, 금융시장국을 담당하는 윌리엄 더들리 부총재가 사실상 최종 판단을 내리고, 계약서 서명 당사자도 그가 되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1시간 가까이 대화를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면서 더들리 부총재가 지나가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통화스왑을)한다면 얼마면 되겠소?"

구체적인 금액까지 질문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윤부국장의 입에서 얼결에 "호주와 비슷한 200억-300억달러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답이 나왔다.
더들리 부총재는 "고려해보겠다"고 답했다. 한-미 통화스왑 성사 가능성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윤팀장은 본부로 통화스왑 가능성을 긴급 타전했다.

7일 티머시 포가티 부총재보 등 금융시장국 실무라인과 한은 뉴욕사무소 외화자산 운용팀간의 컨퍼런스콜을 한차례 더 가진뒤 8일. 한은의 통화스왑 업무 총책임자인 이광주 부총재보가 급히 뉴욕으로 달려왔다.
류후규 한은 뉴욕사무소장, 윤용진 부국장과 더불어 더들리 부총재를 만났다. 마침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 총회 참석차 미국에 와 있던 이 부총재보는 다음날에는 워싱턴에서 미 재무부의 국채 및 국영모기지 업체(에이전시)채권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금융시장 담당 토니 라이언 차관보 등과도 만나 통화스왑 체결을 위한 협의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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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가운데도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돼 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4일자 신문에 한면 가득 실은 '가라앉는 느낌(Sinking feeling)'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심각하게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15일 서울발 기사를 통해 한국이 유동성 악화로 외환보유액중 50억달러의 외화채권을 매각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한국과 러시아 등 외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마련하기 위해 미 국채나 에이전시 채권을 무더기로 내다팔고 있는 상황이 월가에 파다하게 퍼졌다.

뉴욕 연방은행은 16일 다시 한은과의 긴급 면담을 요청했다.
"한국은행이 왜 그렇게 채권을 많이 파느냐"
"국내 금융기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방법이 없다. 팔아서 달러를 마련할수 있는게 국채와 에이전시 채권밖에 없는거 아니냐"

이 즈음이 미 연준으로서는 한국과의 통화스왑 체결이 꼭 필요한 상황인지를 마지막으로 고민한 시점이었다.
결론은 신용경색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시장에서 돈을 빨아들이고 있는 나라들에도 돈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인해 일시적 타격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국한돼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연방은행 총재는 더들리 부총재의 판단에 따라 FOMC에 한국을 통화스왑 대상국에 포함시키는 안건을 이때 제안했다.


이에 상응하는 한국의 조치도 물론 병행됐다. 한은은 14일 미 리포거래를 단계적으로 재개하겠다는 의사를 연준에 통보했다.

23일 낮 3시20분(한국시간 24일 새벽 4시20분)
전화를 해달라는 뉴욕 연준 패트리샤 모서 시장국장 이메일을 받고 전화를 건 윤용진 부국장에게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주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미 통화스왑 체결 확정을 통보받는 순간이었다.
28, 29일 이틀간 열리는 FOMC에서 한국이 통화스왑 대상국으로 추가될 것이며 금액은 300억달러로 확정됐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참석차 공항으로 향하던 이광주 부총재보를 통해 이성태 총재에게 즉각 보고됐다.

강만수 당시 기재부장관(현 대통령 경제특보)은 이와 별도로 24일 베이징 체류당시 윌리엄 로즈 전 씨티그룹 회장에게서 통화스왑 확정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았다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최근 밝혔다.(신제윤 차관보는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날 클레이 라우리 미 재무부 차관보에게서 "통화스왑이 성사될 것 같다"는 '언질'을 받고 강장관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일요일인 26일(미국 시간)에는 통화스왑 계약서 초안이 연준과 한은 양측사이에 교환돼 작성됐다.
다음날인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단언컨대 지금 한국에 외환위기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틀 일정으로 열리는 FOMC는 첫날인 28일 한국을 포함한 5개국과의 통화스왑 안건을 위원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이에 따라 28일 오후 7시30분, 서울시간으로는 한국 증시 개장직전인 29일 오전 8시30분 발표하기로 엠바고가 잡혔다.

하지만 갑자기 발표일정이 FOMC 성명 발표 이후인 29일 오후 3시30분(한국시간 30일 새벽 4시30분)으로 하루 늦춰졌다.
IMF가 회원국들에 대한 단기 유동성 공급창구(STLF)를 신설하기로 하면서 이를 공동발표문에 추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차질이 빚어졌다.
IMF의 단기 유동성 공급창구 신설 사실이 알려지면서 29일 오후부터 시장에서는 한국이 다시 IMF 지원을 받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대됐다. 전날 다우지수 반등에 힘입어 개장직후 8% 가까이 폭등했던 코스피지수는 'IMF행' 루머로 3.02% 급락한채 마감했다.

연준 측은 시장에 워낙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만큼 철저한 보안을 유지해줄 것을 한은에 요청했다. 이때문에 통화스왑 체결을 위해 미 재무부 등을 통해 지원사격을 했던 기획재정부도 가능성에 기대는 걸었지만 체결 확정사실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태파악에 나선 기재부는 뉴욕 한국은행 사무소 관계자를 통해 통화스왑 체결사실을 인지하고 이날 오후 늦게 통화스왑 체결 사실을 한은에 앞서 먼저 언론에 공개했다. 바로 전날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에서까지도 사퇴압력을 받던 강만수 기재부장관은 통화스왑 체결을 진두지휘한 '스타'로 부상,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통화스왑 규모와 조건은 예정대로 다음날 4시40분 연준과 한은을 통해 발표됐다. 몇 시간뒤 열린 한국증시에서 코스피지수는 개장하자마자 7% 가까이 폭등한 끝에 사상 최대 상승률(11.95%)로 장을 마쳤다. 원/달러 환율도 하루에 무려 177원 떨어진 1250원으로 마감했다.

물론 통화스왑 이후에도 한국 금융기관의 신인도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경제위기가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먼이후 통화스왑까지 '숨가빴던 45일'을 고비로 '제2 외환위기' 가능성은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한국을 마지막으로 미 연준 통화스왑의 문은 닫혔고, 이후부터 유동성 문제를 겪는 국가들에 대한 단기 외화 자금 지원 기능은 IMF로 넘어갔다.
이전의 'IMF 구제자금'과 성격은 다르지만, 통화스왑 체결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한국 국민들은 다시 'IMF 지원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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