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인동초로 불리게 된 사연

머니투데이 남형석 기자 | 2009.08.19 14:19
↑인동초 ⓒDJ로드
지난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는 후광(後廣)이지만 ‘인동초’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김 전 대통령이 ‘인동초’라는 말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 언급한 건 1987년이다.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시절인 그해 9월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김 전 대통령은 “나는 혹독했던 정치 겨울 동안 강인한 덩굴 풀 인동초를 잊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라는 연설을 남겼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추운 겨울을 버티고 여름에 아름다운 꽃을 피는 인동초에 비유한 것.

그 이후 김 전 대통령을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동초’는 김 전 대통령의 상징처럼 불리게 됐다.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한 나라의 야당 지도자로 우뚝 선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이 인동초의 강인함과 닮았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선에서 94만여 표 차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석패한 지 한 달 뒤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73년에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사건을 겪기도 했고, 80년 9월에는 내란 선동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수차례 위기에도 김 전 대통령은 살아남아 정치 인생의 꽃을 피웠고, ‘인동초가 되겠다’는 그의 선언처럼 대중은 김 전 대통령 자체를 인동초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식발언으로 언급되기 이전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재야인사들로부터 인동초로 불렸다. 80년대 초 미국으로 망명한 김 전 대통령을 위한 노래의 제목도 ‘인동초(작사 설순관, 작곡 서승일)’였다. 이 노래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곧바로 금지곡이 됐다. 노래 ‘인동초’는 이후 2003년 김삼웅(66) 전 독립기념관장의 서재에서 악보가 발견돼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김대중 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공식문건에 인동초라는 말이 나온 건 87년이 맞지만 그 이전에도 인동초는 곧 김 전 대통령의 상징과도 같은 말이었다”며 “아마 김 전 대통령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87년 이를 인용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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