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일기를 읽을 수 없는 비극

홍찬선 MTN 경제증권부장(부국장)  | 2009.04.23 10:13

[홍찬선칼럼]서양에서도 한문 배우기 열풍인데 한국에선 배척

“할아버지께서 일기를 많이 남겨 놓으셨는데, 그것을 읽어볼 수 없어 죄송스럽고 답답합니다.”

매월 모임을 같이 하는 K회장님의 말에 모두 의아한 얼굴로 K회장을 바라보았다.

“일기가 한문으로 되어 있거든요. 어렸을 때 한자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일기를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요….”

K회장이 “할아버지 일기를 읽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앉아 있던 C 박사도 안타까운 사연을 끌어낸다.

퇴계 율곡 다산, 최고의 철학이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중반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세계 최고의 철학자가 있었고, 19세기 초에는 다산 정약용이라는 불세출의 계몽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선 퇴계 율곡의 철학을 발전시켜 19C말 근대화와 선진국의 초석으로 삼았고, 베트남의 호치민은 목민심서를 항상 끼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선조들의 위대한 유산을 읽을 수 없으니….”

필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신입기자 면접을 할 때 『논어』에 나오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말을 써놓고 읽어보라고 했더니 아무도 읽지 못하더군요. 심지어 한문과 뗄 수 없는 동양사학과 졸업생도 읽지 못하니….”(참고로 이 말은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라고 읽으며 뜻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제대로 알지 못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아집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자 보험회사에 다니는 H팀장도 이런 일화를 꺼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 있잖아요? 지나치게 겸손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뜻이요. 이 말을 했더니 과공비례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물론 사자성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하더라고요…”


옛날에 있었던 고사(古事)를 바탕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한자 4개로 구성된 고사성어인데,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현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자기 조상의 발자취인 족보도 못 읽는 불쌍한 사람들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스런 역사를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엄청난 사료(史料)가 있지만 읽지를 못하니 그림의 떡이요, 돼지에게 다이아몬드 팔찌를 해 준 격이다. 역사처럼 거창한 것 말고도, 집안 어딘가에서 먼지를 잔뜩 쓰고 방치돼 있는 족보(族譜)마저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할아버지 때 일은 구전(口傳)으로 어렴풋이 알지만, 증조부 고조부와 관련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역사의 단절은 가족사의 단절이란 비극으로 연결된다.

요즘 서양에서는 한문 배우기가 한창이다. 철학과 의학은 물론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에서 서양식 합리론에 한계를 느끼고 동양의 기(氣)철학과 선(禪)불교 및 태극(太極)사상 등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던 유카와 히데키도 중용(中庸)에서 중간자의 아이디어를 창안했다고 한다.

우리의 선조는 氣 禪 太極 등에서 한때 세계 최고의 경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한문을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순식간에 최고의 문화유산과 단절되고, 철학의 빈곤에 빠지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에도 가르쳤고, 서양인들도 배우려고 하는 한문을, 한글의 70% 이상이 한자로 구성된 한국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열심히 배우는 한문을 우리는 안 가르쳐서야
세종대왕은 우리글과 말이 중국과 달라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어여삐 여겨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 한글의 우수성은 제레미 다이아몬드가『총 균 쇠』에서 극찬했을 정도이며, 21C 정보화 사회에서는 뛰어남의 진가를 더욱 발휘하고 있다. 소리글자인 한글은 뜻글자인 한자 및 반만년 역사와 변증법적 통합을 이뤄야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해방 후 50여 년 동안 진행된 한글전용으로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잃었고, 21C 경쟁력의 핵심인 지식의 원천인 상상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 늦기 전에 할아버지 일기를 읽지 못하는 불효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루빨리 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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