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외국계 선주는 "선박을 수주해간 해당 조선소 아니면 건조를 맡길 수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선주와 조선소간 끈끈한 신뢰 때문으로 여겼던 A손보사는 오래지 않아 이 선주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선주는 워크아웃에 몰린 조선소로부터 정해진 날짜에 선박을 인도받지 못하길 바랐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들어간 선수금을 돌려받고 이 돈으로 조선경기 침체로 한결 낮아진 선가에 선박 발주를 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RG 함정에 빠진 금융사, 한 푼의 선수금이라도 돌려받으려는 선주들이 각자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보험사 "골치 아픈 RG"
선주들은 조선소가 정상적으로 선박을 건조하지 못해 약정한 기일에 선박을 인도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RG 보증을 받는다. 은행이 발급하며 은행은 보험사에 RG 보험을 든다.
보험사는 보험료의 약 80%를 재보험에 가입한다. 조선소가 정상적으로 선박을 인도하지 못하면 전체 선수금의 20%가량을 보험사가 손실로 떠안는 구조다.
세계적인 재보험사 로이드가 금융감독 당국에 RG보험이 보증보험인지에 대한 유권해석을 요청한 것도 근심거리다. 보증보험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재보험사들이 보험사와 재보험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이 경우 보험사들은 재보험사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RG 손실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선수금 돌려받을 절호의 찬스"
그렇잖아도 발주 취소, 인도일 연기 등을 조선소에 요청하고 있는 선주들 입장에서 조선소의 위기는 극단적으로 말해 '반가운 뉴스'다.
제 날짜에 배를 받지 못하면 발주 취소 등 조선소에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도 선수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한 중소 조선소의 최고경영자(CEO)는 "선수금을 환급 받고 경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일 때 보다 싼값에 선박을 발주 하겠다는 게 선주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 해운 시황 조사기관인 클락슨(Clarkson)의 선박 가격 지수 추이를 보면 지난해 8, 9월 190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올 2월엔 159로 급락했다. 지난해 9월 척당 1억800만 달러인 65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3척을 3억2400만 달러에 발주했다면 올 2월엔 9000만 달러씩 3척을 2억7000만 달러에 계약하고도 5400만 달러가 남는다.
조선업계는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 되면 연말엔 선가지수가 100 전후로 추락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발주금 할인해서라도 위탁건조"
선주에게 타 조선사로 위탁건조를 의뢰한 RG보증 보험사 사례는 아직까진 드문 경우다. 그러나 조선업계 구조조정이 난항을 겪으면서 보험사들의 위험 회피 대책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유동성이 악화되고 금융지원마저 끊긴 몇몇 중소 조선사들이 정상적으로 선박을 인도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선주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해 위탁건조를 의뢰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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