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잔치 하고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

머니투데이 임동욱 기자 | 2009.03.18 08:41

'외담대' 피해업체 대표 국회서 하소연.."외담대 쓰나미 몰려올 것"

"앞으로 빚 잔치하고 회사 문 닫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참에 해외로 이민을 가든지 해야지 대한민국은 중소기업을 잡는 나라입니다."

◇"멀쩡한 회사 문 닫을 판" = 잔뜩 흥분한 목소리의 김중기 사장(가명). '더 이상 기업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는다. 환갑을 넘긴 그는 건설자재 및 건설장비 업체를 운영하는 건설업계의 베테랑으로, 과거 30년 넘게 한 상장기업에 근무하며 임원까지 지냈다.

수년 전 A사를 설립해 아직 규모는 작지만 매년 꾸준히 매출을 늘리며 기반을 다져가던 차였다. 하지만 그를 이처럼 좌절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외담대). 대기업에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결제대금으로 '외담대'를 받은 결과는 '빚'과 '신용불량업체' 딱지 뿐이었다.

"2007년 12월 신성건설이 협력업체들에게 우리은행과 전자어음대출 약정을 하고 계좌를 등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저희는 신성건설에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어요. 직원에게 내용을 확인해 보라고 했더니 '그래봤자 뭐하겠냐'는 핀잔만 들었어요. 맞는 말이에요. 우리 같은 협력업체는 은행과 대기업간 맺은 계약에 무조건 따라야 했어요. 안 그럴 경우 거래 자체를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는 이렇게 외담대를 처음 접했다. '비자발적인 채무자'의 길로 들어선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였다.

신성건설은 지난해 1~4월 지급해야 할 대금은 정상적으로 갚았지만, 그 이후 결제분은 지급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채무자' 김 사장에게 가혹하게 돌아왔다. 돈을 결제하지 않은 것은 신성건설이었지만, 은행에서 직접 대출을 받은 것은 김 사장의 회사로 돼 있기 때문이다.

↑ 피해업체들이 시중은행과 맺은 외담대 약정서에는 '거래처가 지급기일에 "매출채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변제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인이 즉시 상환하기로 합니다'라는 내용의 상환청구권 조항이 포함돼 있다.
신성건설이 결제하지 않아 그의 회사가 대신 덜컥 떠안게 된 금액은 6500만원. 이자와 연체이자만 17%다. 현재 김 사장은 원금을 포함해 이자를 매월 갚아나가고 있다. 일부 수금되는 자금은 은행 빚 갚는데 모두 들어간다.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은 4500만원 가량 남았다.

기업 입장에서 그리 큰 금액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A사는 지난해 4월 이후 신성건설 납품에 대해 결제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쪽에서 갚지 않은 원금과 연체이자까지 은행에 내야 하는 상태다. 김 사장은 자신의 개인 명의로 신용대출을 받아 직원 월급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그저 외담대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김 사장은 지난 17일 오후 여의도 국회를 찾았다. 신성건설 외담대 관련 피해업체들을 대표해 정치권에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그는 의원회관 229호 이정희 의원(민주노동당ㆍ정무위)실 문을 두드렸다. 함께 참석한 다른 피해업체 B사 이도형 차장(가명)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들려 있었다.

↑ 신성건설 외담대 피해업체 대표들이 17일 국회를 방문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의원실에 들어서기 전 그는 "제가 이렇게 억울함을 당해 호소하려 해도 정작 이를 들어줄 곳이 없다는 사실에 강한 좌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다른 정당을 마다하고 민노당을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리 어렵다고 도움을 청해도 매번 '검토해 보겠다'며 되풀이되는 형식적인 답변에 그는 이가 갈린다고 했다. 하루가 급한데 금융 감독 당국 등은 '문제점이나 개선할 사항이 없는지 검토 하겠다'는 뻔한 답변만 늘어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장 실태조사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들을 면담한 김정엽 정책보좌관은 "중소기업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제도라면 개선돼야 할 것"이라며 "외담대 관련 제도적 문제점 여부 등을 따져보겠다"고 말했다.


◇'신용불량기업 딱지=사망선고'=신성건설의 외담대 관련 김 사장과 같은 처지에 처한 기업은 현재 22개사다. 이들이 감당해야 할 금액만 34억원에 달한다. 김 사장은 '현 상태에서 대책이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현재 정상적인 금융거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전산망에 '신용불량기업'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매월 대출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냈지만 대출금 전액을 모두 갚지 않았다는 '연체'사유로 지난 1월 은행연합회 전산망에 불량업체로 올라갔다"며 "이 경우 하도급 지급보증을 못 받게 돼 공사계약을 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자금 대상에서 아예 배제되는 것은 물론, 다른 은행과의 거래도 사실상 끊기게 된다. 결국, 혼자 고립된 기업은 최악의 상황을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불이익을 우려해 기업들은 다른 곳에서 대출받아 이를 메우는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 동석한 이 차장은 "우리 회사는 당장 7억원을 갚으라는 은행측 통보를 받고 다른 금융기관에서 급하게 자금을 대출받아 이 돈을 갚았다"며 "그동안 회사 신용상태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며칠 전 W건설사가 외담대를 결제하지 않아 그의 회사는 3억원을 거래은행에 대신 납부해야 했다. 이 건설사가 결제하지 못한 외담대 금액은 1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차장은 앞으로가 더욱 걱정이다. 그는 "협력 업체들은 결제대금의 60~70%를 외담대로 받는다"며 "건설경기가 언제 좋아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건설사 2차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외담대 발행기업의 협력업체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보통 1개 중견건설사 당 협력업체 수는 250~300개에 달한다. 그 밑의 하도급 업체를 감안하면 숫자는 훨씬 많아진다. 연쇄적인 도미노현상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란 얘기다.

↑ 신성건설 외담대 관련 피해업체들의 명단
◇"은행원 면책?..현장 가봐라"=위기에 처한 김 사장은 은행 기업회생부와 면담을 했다. 은행 측은 거래지점을 찾아가 대출을 타진해 볼 것을 권했다. 최근 은행 임직원에 대한 면책규정까지 생겨 중소기업 대출이 한결 여유로워졌을 거라는 조언도 함께. 반가운 소식에 김 사장은 거래지점을 찾았지만 결과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김 사장은 "정작 은행에 가 보면 정말 온갖 조건을 다 붙여 대출을 해 주지 않는다"며 "아무리 은행원이 면책된다고 해도 부실여신 발생 사실은 지점의 실적으로 잡히기 때문에 리스크를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담대 피해기업들의 요구는 크게 2개다. 우선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은행전산망의 '불량업체' 리스트에서 삭제하고, 외담대를 일반 대출로 전환하는 등 채무재조정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채무재조정 요청에 은행은 대표이사 개인의 '근보증'(계속적인 거래관계에서 발생하게 될 불특정채무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은행은 외담대를 취급하면서 절대로 손해볼 수 없는 구조"라며 "이같은 여건에서 누가 기업을 운영하려 하겠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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