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산은 민영화 미룰 수 없다

권혁세 금융위원회 사무처장 | 2009.02.17 08:09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민영화하는 내용의 산업은행법 개정안과 정책금융공사법 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 두 법안은 산업은행의 공적(公的) 기능과 민간영역을 분리해 공적 기능은 정책금융공사로 독립하고 민간영역인 투자은행(IB)업무는 민영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야는 민영화를 통해 산업은행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금융(IB) 전문은행으로 육성해 한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한다는 취지에는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법안 통과에 진통을 겪고 있다.

대기업 계열사의 출자한도를 제한한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나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 한도를 4%에서 10%로 확대하는 은행법 개정안 등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이른바 '이념법안'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현 상태가 지속돼 2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할 경우 앞으로 지방선거 등 다른 일정에 밀려 후일 통과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1954년 설립된 산업은행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국책은행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민간금융이 취약하던 1960~1970년대에 산업은행은 전력이나 중화학공업 등 기간산업에 대한 지원금융을 도맡으며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경제성장으로 민간금융의 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산업은행의 공적인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민간금융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업무를 놓고 산업은행이 시중은행과 경쟁하는 일도 잦아졌다. "산은법에 의해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만 한다"거나 "신(神)이 내린 직장으로 금융시장에서 '슈퍼 갑(甲)으로 군림한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사실 산업은행을 경제발전 단계에 맞춰 개편하자는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산업은행의 공고(公庫·정책금융)와 상고(商庫·투자은행) 기능을 분리하자는 논의가 시작됐고 1990년대 초반에는 세계화에 따른 투자은행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산업은행 민영화를 포함한 국책은행 역할 재정립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하나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번번이 당위성만 내세웠을 뿐 구체적인 실행계획이나 강력한 추진의지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55년 전통의 국책은행을 민영화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법적으로 부여된 특권을 갖고 정부 보호라는 우산 속에서 영업해온 금융기관이 어느 한순간에 서비스정신으로 거듭나긴 어렵다. 관료적인 문화도 뜯어고쳐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산업은행을 민간 금융회사들과 경쟁하며 시장마찰을 초래하는 정체불명의 금융기관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현재 민영화가 진행되는 기업은행의 경우 법 개정은 18년 전인 1991년에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산은 민영화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가 그 장기 레이스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상황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번에 법 통과가 미뤄질 경우 해묵은 산은 민영화 논의가 몇년 뒤 또다시 제기되는 소모적인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지금 우리가 겪는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는 역설적으로 산은 민영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메릴린치 등 위기에 처한 투자은행을 정통 상업은행(commercial bank)과 합병하는 거대한 금융산업 재편에 나섰다.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합한 공룡 은행들이 속속 출현하는 것이다.

반면 산업은행을 제외하곤 변변한 투자은행 하나 없는 우리 금융산업 현실에서는 조속한 산은 민영화를 통해 금융산업 재편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발맞춰나가야 한다. 당면한 위기 극복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 이후(beyond crisis) 금융산업을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 위해 산은 민영화법 통과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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