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교육계는] 강요된 자율

머니투데이 최중혁 기자 | 2008.12.19 10:04
한 갓난아기가 1900년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버지니아호 1등석 피아노 위에 버려졌다. 이 배 석탄실에서 일하는 흑인노동자 데니는 아기 이름을 ‘나인틴 헌드레드’라 짓고 배에서 몰래 키운다.

천부적인 피아노 실력을 가진 아이는 선상 악단에서 일하며 선원과 승객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지만 한 번도 배에서 내려 본 적이 없다.

재즈의 1인자와 ‘피아노 배틀’에서 이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도 육지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한 여인을 흠모해 단 한 번 배에서 내리려는 시도를 해 보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수명을 다한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

지난 1998년 개봉된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줄거리다. 영화 속 주인공은 계단 몇 개만 내려오면 되는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한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방으로 뻗은 도시에는 끝이란 게 없었어. 피아노는 시작하는 건반과 끝나는 건반이 있지. 88개의 유한한 건반에서 나는 무한한 음악을 만들 수 있어.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내게 배를 떠나라고 권유하는 것은 수백만개의 건반이 있는 키보드를 맡긴 것과 같아. 키보드는 무한하지만 나는 어떤 곡도 연주할 수 없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교육 현장에 ‘자율’ 바람이 불고 있다. 초중고에는 ‘학교자율화’ 정책이, 대학에는 ‘대학자율화’ 정책이 본격 시행되면서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교육계를 지배해 온 관치와 타성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자율과 분권의 교육행정 시스템이 21세기 교육정책으로 옳고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는 위로부터 불어오는 이 자율 바람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목소리도 들린다.


“쇼생크 탈출을 보면 자살하는 할아버지가 나오잖아요? 수십년 감옥생활에 익숙해져 풀려난 뒤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목을 매 버리는 할아버지, 우리가 딱 그 꼴이라니까요.”

교육부, 교육청 지시에 수십년 동안 길들여지다 보니 자율적으로 뭘 하려고 해도 머리와 손발이 잘 안 움직인다는 얘기였다. 당국 말만 믿고 0교시 수업, 우열반 편성, 교복 공동구매 등을 선뜻 결정했다가 문제가 불거지면 책임질 일도 두렵다.

때문에 자율을 목청 높여 요구했던 교육학자들도 후속 보완대책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김흥주 한국교육개발원 교육분권연구실장은 “한 번 자율로 넘긴 사항은 문제가 발생해도 재환수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을 요한다”며 “속도조절 전략, 우선순위 판단 전략, 여론 설득 전략, 시행착오 최소화 전략 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정화 홍익대 교수도 “권한 이양은 바람직하지만 시도교육청의 역량이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우려 분위기가 없지 않다”며 “교육기관의 역량 개발을 위한 계획 수립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트럼펫 연주자 맥스는 배에서 최후를 준비하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안타까워 설득하러 가지만 결국 그를 남겨두고 홀로 나온다. 강제로라도 배에서 끌어내리는 게 맞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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