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오모테섬 주민, 이시가키 긴세이 씨(62)가 일본 전통악기 '사미센'을 연주하며 한국 민요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이리오모테=황국상 기자
옥색으로 빛나는 바다, 산호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 해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는 울창한 아열대우림, 굽이굽이 깊고 그윽하게 흐르는 푸른 강, 2층 이상 높은 빌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주변 경관은 마치 과거로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이곳은 일본 최남단 행정지구인 오키나와 현에서도 400㎞나 더 남쪽에 있는 이리오모테(西表) 섬. 넓이가 289㎢로 서울 강북지역 전체(297㎢)와 맞먹지만 인구는 1200여 명에 불과하다. 연평균 기온은 22~23도 정도로 일년 내내 두꺼운 외투를 걸칠 일이 없다.
섬 전체의 90%를 삼림이 차지하고 있는데 모두 국유림이다. 일본 정부의 삼림 보호정책에 따라 섬 안에 자동차 도로라곤 해변을 따라 이어진 130여㎞ 길이의 도로가 전부다.
전체 길이가 40㎞인 우라우치 강에만 410여 종의 물고기가 서식한다. 이곳에 살고 있는 멧돼지만 해도 3000~4000마리로 인간보다 몇 곱절은 많다. 전 세계에서 이 섬에서만 살고 있는 '이리오모테 산고양이'는 지역 주민들이 아끼는 명물 중 하나. '산고양이가 자동차에 치여 죽었다'는 뉴스가 지역 언론에 보도될 정도다.
지난달 하순 한국과 일본을 각각 대표하는 비정부기구(NGO)인 환경재단과 피스보트가 공동 주최한 '2008 피스 앤드 그린보트(2008 Peace&Green Boat)' 행사 참가자들은 이시가키(石壇) 섬에서 여객선을 타고 1시간만에 이리오모테 섬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한국인과 일본인 할 것 없이 저마다 탄성을 발하며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바빴다.
이리오모테 섬 내 소나이(祖納) 부락의 대표이자 1970년대 말부터 이 지역에서 생태관광 운동을 벌여온 이시가키 긴세이 씨(石壇金星, 62)가 행사 참가자들을 맞았다.
그는 일본 전통악기 사미센(三線)의 명인이기도 하다. 사미센은 이리오모테 섬에서는 '산신'이라고 부른다.
"이리오모테 섬은 인간이 압도적으로 소수인 유인도입니다. 1900년대 초중반 말라리아 때문에 섬 전체가 폐쇄됐다 말라리아가 박멸된 후 다시 사람들이 몰려와서 지금의 섬이 만들어졌어요. 여기 한국인들도 계신데 이곳 이리오모테 섬은 한국인들과 참 연관이 깊은 섬이랍니다."
'한국인들과 연관이 깊은 섬'이라는 말에 한국측 참가자들의 귀가 쫑긋해졌다. 이시가키 씨는 지긋이 눈을 감으며 아름다운 풍광 속에 가려진 아픈 이야기를 들려줬다.
◇恨 섞인 아리랑 들으며 韓日 서로를 바라보다= 일본 본토 가고시마로부터 1200여㎞ 떨어진 이리오모테 섬에 대한 기록은 15세기 한 조선인이 이 섬에 표류했다 돌아가서 남긴 것이 최초다. 지금도 섬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을 처음으로 기록해준 그를 기리고 있다고 한다.
섬 주민들의 삶은 궁핍하진 않았지만 평화롭지도 않았다. 1600년대부터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함과 상선이 난입해 처녀들을 납치해갔다. 19세기 말부터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들어와 요새를 건설했다.
태평양전쟁 때는 조선인들이 몰았던 콩 수송선이 이리오모테 섬에 좌초하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이들을 이리오모테 섬 북서부의 탄광으로 끌고가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조선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거동을 못하게 되자 일본군들이 이들을 숲에 갖다 버렸다.
이시가키 씨는 "멀지 않은 곳에 그 조선인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다"며 산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쟁의 폭력성은 일본인도 피해가지 않았다. 일본군은 일본 큐슈 지방 남자들도 광산에 끌고 갔다. 이곳 광산에서 일했던 1000명 정도의 일본인 광부들 중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없다고 한다. 아직도 이 지역에 큰 비가 올 때마다 당시 아무 데나 버려지거나 묻혔던 이들의 유골이 발견된단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던 참가자들이 이시가키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차 숙연해졌다. 한 일본인은 "더 이상 못 듣겠다"고 발길을 돌렸다. 한국인 참가자들은 그 조선인 광부들의 유골이 있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이시가키 씨가 한 관광객에게서 사미센을 건네받아 현을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부른 곡은 '아리랑'.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가며 부르는 그의 노래가 섬에 울렸다.
◇역사·환경·문화 유적이 난개발로 사라진다면= 이시가키 씨와 참가자들이 이어 방문한 곳은 3만년 이상 산이 깎여 만들어졌다는, 이리오모테 섬의 신들이 12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다고 하는 투두하리 해변이었다.
옛날엔 남편이 부정한 행실을 하면 여기 와서 곤장을 15대 맞고 술 한통을 다 마셔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시가키 씨는 "여행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자연에서 비롯했다는 점에서 모든 나라가 같아요.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사람들 사는 것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게 곧 여행이죠. 생태적 여행이란 우리가 여기에서 한 행동을 실천하면 그게 생태적 여행이랍니다."
이처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이리오모테 섬도 자칫 지금 모습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일본 유니마트 등 개발회사들이 이곳에 놀이시설과 호텔 등 리조트 단지를 건설하려고 땅을 매입하고 있기 때문.
이시가키 씨 등 지역 주민들은 개발사업이 섬 내 문화·역사 유적과 환경을 파괴할 것이라며 반대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