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IMF 학번', 이자폭탄에 펀드 반토막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 2008.12.02 09:51

2008 대한민국-위기의 경제, 위기의 세대<2>

# 대기업에 다니는 92학번 정태현씨(35세·가명)는 요즘 월급통장 잔액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연봉이 남 부럽지 않은 편인데도 월급 나오기 직전 잔액은 항상 5만원 미만이다.

두 살배기 딸 아이 키우는데에만 월 100만원 가까이 든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쓰는 신용카드비 70만원, 적립식펀드 30만원, 보험료 20만원, 휴대폰 요금 10만원 등이 나가고 아내에게 생활비까지 주고 나면 겨우 적자를 면할 정도로 빠듯하다. 기름값 아끼려 자가용까지 놓고 다니는데도 이렇다.

가장 치명적인 건 결혼할 때 끌어다 쓴 주택담보대출 이자다. "결혼할 때 집 못 사면 평생 못 산다"는 주변의 말만 듣고 주택담보대출로 1억5000만원이나 끌어썼는데, 올들어 금리가 뛰더니 이제는 한달 이자만 90만원에 달한다. '이자폭탄'이란 말을 실감난다.

# 금융공기업에서 일하는 94학번 김진호씨(33·가명)는 요즘 매월 날아오는 펀드 운용보고서를 아예 뜯어보지도 않는다. 결혼할 때 쓸 전세 자금을 마련하려고 지난해 6000만원을 펀드 3곳에 나눠서 넣었는데 모조리 반토막이 났다. 사정도 모른채 프로포즈만 기다리고 있는 여자친구를 볼 면목이 없다. 대출로 해결하려고 해도 이자를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 시중은행에 다니는 95학번 박홍수씨(32·가명)는 지난 2년간 준비해 온 해외 유학을 최근 포기했다. 학사 학력으로는 금융권에서 큰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미국 경영대학원 진학을 준비해왔지만, 원/달러 환율이 1500원선으로 뛰면서 도저히 자비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회사 다니면서 경영대학원 입학시험(GMAT)에 토플(TOEFL)까지 공부하느라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 자며 고생하고, 학원비와 시험료로 월 80만원씩 쓴 게 아까워 미칠 지경이다.

지난주에는 유학을 함께 준비하던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조조정 때문에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아이가 곧 태어날 예정이라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이 후배도 모아둔 돈이 모자라 당분간 유학의 꿈은 접었다고 했다.


90년대 초반 학번을 '비운의 세대'라고 한다. 남성의 경우 군대 다녀온 뒤 졸업하자마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취업문이 막혔다. 유학갔던 이들은 당시 환율 폭등 탓에 학업을 접고 중도 귀국해야 했다. 때문에 서른에 가까운 2000년쯤이 돼서야 늦깎이로 사회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당시 취업문이 넓었던 정보기술(IT) 벤처기업에 입사한 이들은 2000년대초 IT버블 붕괴와 IT경기 침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이들이 2008년 또 한번의 비운을 겪고 있다. 결혼하면서 집 한 채 장만하겠다고 한껏 주택담보대출을 끌어쓴 이들은 이자 폭탄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2년 전까지도 5%대에 불과했던 변동금리부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최근 7%대로 올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민 우리 신한 하나 SC제일은행 농협 등 6개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가계의 원리금상환부담률(원리금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15.3%에서 지난 6월말 20.7%로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마저 뛰면서 살림살이는 더욱 빠듯해졌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소득이 제자리 걸음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 실질소득 증가율은 작년 동기 대비 0.0%였다. 근로자들은 상황이 더 나쁘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3분기 근로자들의 평균 실질임금 240만5000원으로 작년 동기보다 오히려 2.7% 줄었다. 7년만의 첫 감소였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려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반토막'의 아픔을 겪는 이도 부지기수다. 지난해 10월 2000선을 돌파한 코스피지수는 지금 1000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환매하자니 날린 돈이 아깝고 주가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자니 '늦깎이 입사'에 이어 '늦깎이 결혼'까지 각오해야 할 판이다. "결혼은 코스피지수가 얼마나 빨리 1800을 회복하느냐 여부에 달렸다"는 자조 섞인 우스개소리까지 나온다.

해외 유학의 부푼 꿈도 환율 폭등 속에 날아갔다. 올초 1000원선이던 환율이 1500원선으로 뛰어오르면서 유학비 부담이 50% 가까이 늘어난 때문이다. 여기에 경기침체와 함께 구조조정의 암운까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외환위기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비운의 세대' 90년대 초반 학번은 '시대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네 남편이 나 사랑한대" 친구의 말…두 달 만에 끝난 '불같은' 사랑 [이혼챗봇]
  2. 2 노동교화형은 커녕…'신유빈과 셀카' 북한 탁구 선수들 '깜짝근황'
  3. 3 '6만원→1만6천원' 주가 뚝…잘나가던 이 회사에 무슨 일이
  4. 4 "바닥엔 바퀴벌레 수천마리…죽은 개들 쏟아져" 가정집서 무슨 일이
  5. 5 "곽튜브가 친구 물건 훔쳐" 학폭 이유 반전(?)…동창 폭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