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 온다는데…'떨이'천지 뉴욕 풍경

뉴욕=김준형 특파원 | 2008.11.25 12:48

[김준형의 뉴욕리포트]집·차·쇼핑, 몇달전과 180도 딴판

연말 대목을 맞은 미 뉴욕 맨해튼의 5번가의 저녁.

'세계 쇼핑 1번지'로 꼽힐 정도로 명품점들이 밀집한 이곳은 예년처럼 5번가 중앙에 별 모양의 큼지막한 조명 장식을 내걸고 쇼핑객들을 유인하고 있다. 하지만 길가에 세워진 구세군 자선 냄비만큼이나 매장들도 썰렁해 보인다.

▲전통적인 조명 장식이 내걸린 뉴욕 맨해튼의 5번가에서 구세군 자선냄비 옆을 쇼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예년과 달리 할인행사를 실시하는 명품점들이 늘고 있다.

반면 인근 이면도로의 노점상에서는 5달러짜리 실크 숄과 브라우스가 날개돋힌듯 팔리고 있었다.

구찌 롤렉스 티파니 루이뷔통 등 세계 최고급 명품 본점들은 아무리 급해도 'SALE'간판을 내거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2주전 아르마니가 주말 한시적으로 30% 할인판매를 실시하고, 에스프리가 100달러 사용고객에게 30%를 돌려주는 행사를 여는 등 불황의 그림자를 견디지 못하고 한 두곳씩 콧대를 낮추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단골 고객들에게는 예년보다 파격적인 할인폭을 제시하고 있다고 직원들은 말한다.

▲뉴욕 맨해튼 5번가 루이 뷔통 매장앞의 쇼핑객들.

맨해튼을 벗어나 교외지역의 대형 몰이나 아울렛에서는 체면을 의식하지 않는 파격할인 행사가 이어지고 있어 아직 주머니사정이 여유있는 쇼핑객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연말 쇼핑시즌의 공식 개막을 알리는 '추수감사절'(27일)을 앞두고 올 한해 '죽쒔던' 장사를 되돌리려는 업체들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세일에 인색하기로 소문났던 'C핸드백'같은 브랜드도 50% 할인을 내걸고 고객 끌어모으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고급 소비자를 주고객으로 하는 블루밍데일 백화점은 '겨우' 100달러 이상을 구매한 고객에게도 무료 우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서고 있다.

주거 교통 등 가계부 비중이 큰 생활 필수 지출 항목의 가격하락도 피부에 팍팍 와 닿는다. 한국 기업 주재원 K씨는 요즘 이사갈 집을 찾고 있다.
렌트비가 몇달전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 집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K씨는 환율이 1년만에 50% 가까이 올라 한국에서 송금할 수 있는 국내 월급이 그만큼 깎였기 때문에 적은 돈을 내고도 큰 집을 얻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

▲5번가 노점상의 5달러짜리 실크 의류 노점상 앞에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가장 학군이 좋다는 버겐카운티, 그중에서도 주거환경이 좋은 지역의 3베드룸 짜리 주택이 월 렌트 2700달러, 2베드룸은 2000달러까지 내려갔다. 몇달전만 해도 생각하기 힘든 가격이었다.

주택과 함께 생활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출 가운데 하나인 자동차 관련 비용도 크게 떨어졌다.

뉴욕 메트로 지역만 하더라도 맨해튼과 뉴저지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휘발유 값이 갤런(3.79리터)당 2달러 아래로 내려간 주유소를 찾는게 어렵지 않다.

지난 여름 중형 승용차 휘발유 탱크를 채우려면 75달러 이상을 줘야 했던 미국인들은 이제 50달러 지폐를 내밀면 넉넉한 거스름 돈을 되돌려 받고 있다.
민간 자동차 소비자 단체인 '전미자동차 협회(AAA)'에 따르면 미국 전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이미 이달 들어 갤런당 2달러 아래로 내려갔다.

▲뉴저지 한 대형 쇼핑몰의 선물센터. 연말을 맞아 50%까지 할인판매한다는 광고문이 매장을 뒤덮고 있다.

새차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파산 위기에 직면한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물론이고 외국차들조차도 차종별로 최고 1000∼5000달러에 이르는 할인판매를 실시하고 있다. 신용도가 높은 고객에게는 0% 금리로 자동차 대출을 제공한다.
일리노이주의 한 크라이슬러 자동차 딜러는 정가 3만9000달러짜리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구입하는 고객에게는 주행거리 1만마일 이하의 2008년식 'PT 크루저' 왜건을 단 1달러에 끼워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골프장에도 예년 겨울보다도 훨씬 골퍼들이 줄면서 가격이 크게 내려갔다.
여름 성수가 100달러 이상하던 라운딩 가격을 40달러(4만원)까지 낮춘 뉴저지의 골프장 사장은 "12월이면 30달러 아래로 더 낮춰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놀리는 것 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뉴저지 한 주유소의 가격표시판.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2달러로 불과 몇달만에 절반으로 떨어졌다.

체감물가의 급락은 실제 통계수치로도 확인된다.
미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달 대비 1% 하락하며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47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10월 생산자물가지수(PPI)도 전월대비 2.8% 하락, 역시 통계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하락률을 기록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인플레이션보다 더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다. 물가가 떨어지면 기업들은 수익성이 악화돼 고용을 줄이고, 실업확대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기업들 도산이 확산되는 '나선형 퇴행'이 디플레이션의 악몽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아직은 디플레이션을 우려할만큼 소비심리가 얼어붙었다기 보다는 폭등했던 에너지 가격이 폭락세로 돌아서고, 신용경색에 직면한 소매업체들이 대대적인 할인에 나서면서 물가가 급락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불과 몇 달전까지 사상 유례없는 에너지 곡물 가격 폭등을 겪었던 소비자들로서는 설사 디플레가 온다해도 인플레보다는 당장은 '반가운' 손님일수 밖에 없다.

정부가 돈을 찍거나 풀어대고, 유가나 원자재 가격이 초래한 인플레이션 앞에서는 속절없이 자신의 돈이 강탈당하는걸 지켜봐야 하지만, 디플레 아래서는 (돈이 바닥날때까지는)'돈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쇼핑백을 양손 가득히 들고 몰을 나서는 미국인들,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눈앞의 '떨이'는 즐기고 보는 그들이 소비 회복을 통해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나,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나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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