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쇠꾼들' 길을 잃다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 2008.11.25 04:12

[머니위크]청계천 상인, 동남권 유통단지 이주 딜레마


“자네 같으면 거기 가겠어? 동남권 가면 손님이 올 것 같아? 게다가 1층은 몇집 안주잖아….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이 근처로 다 옮겼어.”

동남권 유통단지 나동 분양 첫날인 11월3일, 청계천 상인들은 대부분 서울시가 유치하는 일명 ‘가든파이브’의 이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상권이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바로 형성되는 게 아니거든.” 15년 동안 공구 골목을 지켜온 정상진(51ㆍ가명) 씨의 말이다.

청계천 일대는 대한민국의 잡화상이다. 이곳은 기계, 공구를 포함해 IT, 전자, 전기, 귀금속 상점 등이 밀집해 한국 근대화의 역사를 이끌었다. 그 상권이 얼마나 컸기에 ‘핵폭탄 빼고 못 만드는 것이 없다’는 말까지 있었을까.

이곳 사람들은 보통 ‘쇳밥’을 먹는다고 이야기한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금속과 연관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이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일궈놓은 쇳밥혁명은 도심재창조라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 자리를 내주는 운명을 맞았다.

◆멀고 먼 동남권 유토피아

수표동 골목에서 배관자재 등을 판매하는 김진권(44ㆍ가명) K상사 대표는 동남권 유통단지의 입주를 포기했다. 유통단지가 현대식 건물이라 매력적이긴 하지만 입주비가 너무 비싸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가게처럼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상점들이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5만원 정도 됩니다. 대로변에 있는 큰 상점도 보증금 2500만~3000만원에 월세 150만~250만원인데 동남권 유통단지에 가려면 적어도 2억원은 있어야 해요.”

물론 세입자에서 자기 상점을 가진 엄연한 부동산 소유자로 변하는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어찌됐건 먼나라 이야기다.

실제로 SH공사가 청계천 인근의 점포에 배포한 분양자료에 따르면 층별 호수별 면적별 차이는 있지만 분양가격이 수억원 이상이어서 영세상인들이 입주하기에는 상당히 벅차 보였다.

지상1층의 1-A01호는 전용면적 24.30㎡(약 7.35평)에 분양가격 3억7382만원, 1-C10호는 27.18㎡(약 8.22평)에 4억7123만원에 이른다. 고층으로 갈수록 가격은 낮아지지만 부담은 마찬가지다. 5층에 위치한 5-E20호의 경우 전용면적 24.44㎡(약 7.39평)의 분양가격은 1억1672만원이다.

김씨는 “여기 있으면 도로변에서 가공할 수 있는 1층에 위치하면서 30평(약 100㎡)이 넘는 면적의 사무실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면서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같은 영세업자가 1억원이 넘는 자금이 있을 리 있겠느냐”며 혀를 찼다.

◆동남권 이주자의 고뇌

기업에 전선 자재를 납품하는 이권상(55ㆍ가명) 씨는 동남권 유통단지에 분양을 신청했다.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이 씨의 회사는 이 동네에서는 꽤나 규모가 큰 축에 속한다. 여유자금이 있다 보니 동남권에 분양을 받지 않았다가 혹시나 모를 ‘호박’을 발로 차는 꼴이 될까 싶어 계약금을 납입했다.

이씨는 동남권 이전 결정을 하고 난 뒤 불안감에 휩싸였다. 주요 거래처 중 하나인 모 그룹이 최근 부도설에 휩싸이면서 자금회전이 멈췄기 때문이다. 수억원에 달하는 자재값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매일같이 그룹 자재구매 담당자를 만나 결제를 부탁했지만, 어려운 때 다그친다며 ‘매정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로변에서 대형 공구점을 운영한다는 차석구(48ㆍ가명) 씨는 ‘분점’을 계획하고 있다. 입주비용은 은행대출을 통해 분양대금의 90%를 충당하기로 했다. 동남권 유통단지의 상권이 근시일 내에 형성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3년 뒤 전매제한이 풀리면 시세차익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청계천 상권을 등지고 동남권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기에는 위험도가 너무 높다. 공실이 많은 상가에 손님이 몰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차 씨는 결국 지금의 점포를 인근 청계천 주변으로 자리를 옮기는 대신 동남권 유통단지의 상가는 분점 형태로 운영할 계획이다.

다만 서울시와 SH공사가 분점을 금지하고 있어 마음에 걸린다. 서울시는 도심재개발사업을 위한 이주가 목적이기 때문에 청계천변과 동남권 유통단지 양쪽에 점포를 내는 행위를 막고 있다.

상인들은 수십년간 꾸려온 상점의 이름을 바꾸면 단골 고객이나 거래처에게 혼란을 줄 수 있어 꺼리고 있다. 차 씨는 아직 동남권의 상호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청계천 상인들을 위해 조성한 단지인 만큼 규제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전매와 전대(세를 놓는 행위), 양도 등을 금지하고 3년간 계약자 본인이 직접 운영해야 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동남권 유통단지 입주자가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 기간 동안 직접 상점을 운영해야 한다.

◆동남권 유통단지의 ‘참담’한 성적표

동남권 유통단지의 분양률이 90%에 육박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있다. 분양가격을 조성원가로 분양하고 있어 당초 예상보다 분양률이 높고 반응도 뜨겁다는 것. 실제로 동남권 유통단지의 인기는 어떨까?

SH공사 관계자에 따르면 분양을 끝낸 나 블록의 실제 계약자는 20%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0월31일까지 분양신청을 받은 나 블록은 아파트형공장으로 중소기업육성자금을 통해 분양금액의 75%까지 연 5%짜리 자금을 지원해 준다. 그러나 540명 모집에 71명만 신청해 전체분양의 13.1%에 그쳤다. 타 블록에 비해 좋은 조건임을 감안하면 매우 부진한 결과다.

계약이 부진한 이유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높은 분양가다. 공사 측의 주장대로 원가 분양을 했다 하더라도 청계천 세입자들이 입주하기 부담스럽다. 이 점에 대해 SH공사 측도 수긍하고 있다.

SH공사 관계자는 “불황과 고금리 영향으로 세입자에게 분양가격이 높게 느껴지는 것 같다”면서 “부동산 경기 영향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또 “일부 상인들은 전용면적 7평(약 23㎡)만 생각하지만 계약면적은 주차장과 공용면적 등을 포함해 20평(약 66㎡)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상인들의 호응이 미진하자 SH공사는 별도의 대책을 강구중이다. 회사 관계자는 “계약이 끝나면 상황에 따라 임대나 일반분양 형태로 진행할 수도 있다”면서 당초 분양계획 수정이 불가피함을 내비쳤다.

◆영세상인은 어디로?

동남권 유통단지는 도심개발에 따른 상인들의 이주를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동남권 유통단지에 입주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서울시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는 상태다. 서울시 측은 영세상인들을 위한 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특별히 없다”고 답했다. SH공사 측은 “영세 상인들을 위해 최고 90%까지 대출알선을 하고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영세상인에게 90%의 대출금 부담도 문제지만 일부 구역에서는 대출하겠다고 나서는 은행이 없어 사업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가 블록의 경우 대출거래은행으로 신한은행이 우리은행을 제치고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으나 최종 합의가 결렬됨에 따라 분양일정이 연기됐다. 현재 나 블록은 국민은행에서, 다 블록은 신한은행에서 대출 지원을 하고 있다.

이주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상인들은 구로, 시화 등 공단 인근이나 청계천변의 다른 개발예정지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수표동 한 공구상가 직원은 “상인들은 이미 상권이 형성돼 있는 청계천 인근의 자리를 수소문하고 있으며 몇곳은 벌써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일종의 풍선효과다. 서울시가 도심 부적격사업으로 판단하고 있는 제조업이나 공구상 등의 이주 계획이 또 다른 도심 내 부적격 사업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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