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금융시스템' 필요 공감…IMF·세계은행 '리폼'
'브레튼우즈 II', '신 브레튼우즈' 등 표현은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위기를 맞은 세계경제를 지배할 새로운 금융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데 각국 정상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금융위기의 구세주로 급부상한 영국 고든 브라운 총리는 지난해부터 글로벌 경제의 규제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 13일에는 국제사회에 '신 브레튼우즈'(New Bretton Woods)를 도입하자고 직접적으로 화두를 던졌다.
이에 화답하듯 세계무역기구(WTO), 유럽중앙은행(ECB) 등 세계 주요 경제 권력기관의 수장들이 새로운 금융시스템의 필요성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신 브레튼우즈'에 대한 논의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파스칼 라미 WTO 총재는 1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 경제에 대한 규제강화라는 차원이라면 '신 브레튼우즈' 체제에 적극 동의한다"며 브라운 총리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ECB의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도 이날 미국 뉴욕의 이코노믹클럽 연설에서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로한 것은 초기 브레튼우즈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미시경제, 통화, 시장에 대한 규제 시스템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별도로 앞선 12일 러시아의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은 IMF·세계은행 연차 총회 직후 "IMF, 세계은행(WB) 등 브레튼우즈 체제를 뒷받침하는 기관들이 금융위기에 적절히 대처할만한 기능이 없는 상태"라며 "이들 기관의 개편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우크라이나 등 일부 국가들이 IMF에 지원요청을 하는 등 조기에 대처하지 못하면 세계 외환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이같은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2차대전으로 공황을 경험했던 나라들이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성사시켰듯이, 이에 준하는 강력한 시스템이 등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헤게모니' 경쟁 치열…대주주 미국이 관건
세계경제의 새질서가 등장을 앞둔 상황에서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 당사자들은 물밑에서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선 '신 브레튼우즈'를 주장한 유럽 국가들은 위기의 원흉인 미국에 대한 견제를 나타내고 있다.
트리셰 ECB 총재는 이번 금융 위기의 원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에 따른 후유증이 쌓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며 미국의 책임론을 들었다.
1944년 출범한 브레튼우즈 체제는 '강한 미국, 강한 달러'를 전제로 한 금본위 '고정환율제'였다. 언제든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전제로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로 자리잡았고 외환시장은 고정환율제 하에서 안정됐다.
그러나 자국내 경제문제로 시달리던 미국이 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기를 거부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에 금이 갔고, 이후 IMF의 권한은 유지한채 미국의 책임만 없어진 '변동환율제'의 킹스턴체제로 전환됐다.
트리셰는 미국의 '약속 파기'가 세계 금융시스템에 상호불신과 규제 해제의 악영향을 가져왔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초기 브레튼우즈의 '규제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러시아 쿠드린 재무장관은 "G7 회담을 비롯한 기존 방식으로는 위기해결이 어렵다"며 EU와 미국을 동시에 견제했다. 그는 "세계은행에 더 광범위하고 강화된 기능을 부여해야 한다"면서 "개발도상국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의 발언권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G7의 공조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미국이 G20에 도움을 청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 등 신흥 강대국들은 '신 브레튼우즈'에서 지분확대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신 브레튼우즈' 탄생의 최대 걸림돌은 현재 IMF의 실질적인 대주주 역할을 하는 미국이다. 위기의 원흉인만큼 권한축소에 대한 압박을 받고있는 미국은 유럽 각국의 잇따른 주장에 별다른 대응을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수단대학의 알리 압달라 교수는 "미국은 IMF에서 '거부권'을 가지고있어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며 "미국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IMF와 현재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세계 경제의 '악'이다"고 주장했다.
◇IMF 권한 '강화'냐 '변화'냐…방법론 불확실
'신 브레튼우즈'의 도입에는 여러 국가들이 뜻을 모으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은 불확실한 상태다. 주요 외신들을 통해 알려진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국가간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강화 △BIS·바젤2를 대체할 리스크 관리기준 마련 △IMF·세계은행의 기능 재편 등으로 요약된다.
기존 금융기관의 자본건전성, 리스크 관리수단으로 사용됐던 BIS비율, 바젤1·2 등이 최근 대형 은행들의 잇따른 도산에 속수무책이었음을 통감한 지도자들은 '새로운 금융시스템'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대안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IMF, 세계은행의 기능 재편도 쉽사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대주주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IMF와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금융시스템 도입을 다른 국가들이 꺼릴 가능성이 크다. 이번 금융위기 해결 뿐만 아니라 향후 세계 금융시스템을 지배할 기준을 마련하는 문제라 신중할 수밖에 없다.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IMF와 세계은행의 감시 대상은 개별 국가에 한정돼있어 범국가적인 자본이동과 거래에는 사실상 개입할만한 권한과 수단이 없다는 지적이다.
유럽개발·부채네트워크(EURODAD)는 9일 "IMF의 사각지대는 세금 피난 지역에 대한 문제"라며 "현재 금융시스템 안정대책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지만 숨겨져있는 역외 자본거래는 규모를 알 수 없고 책임소재도 불분명해 시장 참여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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