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버린' 글로벌공조, 더 큰 악몽의 시작?

머니투데이 이승제 기자 | 2008.10.14 11:03

개별 회사 리스크→국가 리스크로 확대

-채권, 주가 등 가격 산정의 기초 훼손
-'시장 자율 기능을 통한 회복' 무시
-경영진과 주주에 대한 책임 추궁 없어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은 국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한국에 대해 가혹했다. 자금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살인적인 고금리 정책과 강력한 부실기업 정리를 요구했다. 고금리를 통해 숨어있는 부실기업을 솎아내고, 동시에 부실기업을 과감히 청산하라고 주문했다.

한국은 IMF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고, 이 과정에서 대우그룹을 비롯해 30대기업 중 17개가 무너졌다. 하지만 한국경제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건전성, 투명한 지배구조 등을 갖춘 우량한 기업과 금융회사들을 등장시켰다. 새로운 출발의 고삐를 마련한 것이다.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주요 IB(투자은행)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파생상품 시장에서 서로 얽히고설킨 금융회사들은 일제히 유동성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상업은행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고금리 정책과 부실기업 정리라는 '상식적인 수준'이 현 상황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다. 대신 '유동성 무한정 공급'을 통해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천명한다. 국채발행 등으로 비교적 유동성 확보에 유리한 국가가 직접 나서 자국 금융회사의 부실을 대신 떠안는 방식이다. 각국은 성공을 자신한다. 계획대로 되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면 해당 국가의 디폴트(파산)를 감내해야 한다.

주요 선진국이 14일 일제히 유동성 무한정 공급을 기본 틀로 한 위기처방 정책을 내놓았다. 미국과 유럽 증시는 이에 호응해 일제히 폭등했다. 한국증시도 전날에 이어 상승 폭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에 대해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저버렸다"며 우려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이 국가 디폴트라는 대가를 걸고 사상 최대의 모험을 감행했다는 해석이다.

◇무너진 원칙, "시장은 없다"(?)=문기훈 굿모닝신한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런 방식이라면 디폴트 리스크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며 "이번 조치는 전례가 없는 것으로, 원칙과 기준을 무시한 임시방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문 센터장은 이번 조치의 문제점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필요한 자금을 정부에서 무한정 공급해 주기로 했다. IB, 상업은행 등이 모기지 관련 채권이나 각종 파생상품에서 입은 손실을 메워주기로 했다. 둘째, 주로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 출자를 유동성을 공급, 기존 주주의 주주가치 희석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셋째, 예금자에 대해서도 원금을 모두 보장해 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같은 조치는 자본주의의 원칙을 크게 훼손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과도한 레버리지(차입경영)으로 유동성 위기를 자초한 경영진과 주주들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려 한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과 주주들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던 한국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또 이번 조치는 부실 금융회사들을 '비정상적으로' 연명시킴으로써 시장의 가격형성 기능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금융회사나 기업의 채권이나 주가는 현재 가치(수익), 미래 가치(수익)과 함께 디폴트 가능성 등을 기초로 산정된다. 하지만 무너져야 할 회사를 국가가 인위적으로 연명시킴으로써 디폴트 가능성 등을 산정할 기초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장 큰 원리인 '시장에 의한 가격 형성'에 위배된다는 얘기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 IMF는 지금과 같은 과정(국가의 직접 개입을 통한 임시 유동성 공급)을 절대 하면 안된다고 요구했다"며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 경제규모를 줄이며 건전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둬야 하는데, 이번 조치는 추가 유동성 공급을 통해 부실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없애려는 어려운 도전"이라고 분석했다.

이 센터장은 이어 "이는 미국이 지난 200여년 동안 유지해 왔던 경제 원칙과 플랜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라며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데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 리스크의 등장(?)=이번 조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의 자율기능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과도한 거품형성에 대한 응징 없이 추가로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해 부실을 일단 수면 아래로 내리려는 노력이다.

이종우 센터장은 "전 세계적으로 총 3조 달러가 넘는 유동성이 공급될 예정으로, 만약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며 "지금은 각 금융회사를 국가가 떠안아주지만, 국가유동성이 문제가 될 경우 이를 처리해 줄 상위 기관은 없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이어 "지금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예상하기 힘든 폐해를 낳게 된다"며 "한마디로 엄청난 도박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문기훈 센터장은 "시장에 의한 자정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정상적인 유동성 팽창을 가져올 수 있다"며 "시장의 모럴 해저드가 선진국 정부의 모럴해저드로 나아가는 양상"이라고 비판했다.

'손실 확정→부실기업 정리→기업의 재무·경영 건전성 향상→시장 자율기능 회복'이라는 정상 수순을 저버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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