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최진실과 페일린

머니투데이 윤석민 국제경제부 부장 | 2008.10.10 07:20
한 이동통신사의 TV 광고가 요즘 인상적이다. 담벼락에 숨은 남학생과 수줍은 듯 아이가 건네는 쪽지를 받아드는 여학생. 당시의 메신저란다. 교복세대로서는 아련한 추억과 함께 공감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다. 과거 교과서 한 귀퉁이에 그려진 그림들이 빨리 넘겨지며 펼쳐지던 요지경은 오늘날의 동영상이고.

그럼 여배우 최진실의 자살로 인해 다시금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 댓글은 무엇이었을까? 화장실 벽을 가득 채우던 낙서들이 그 전신은 아닐런지 연결지어본다.
쪼그려 앉던 변기시절 벽을 메웠던 낙서들은 저려오는 다리와 코를 자극하던 냄새를 날려주던 '청량제'였다. 그리고 그 벽면은 열린공간이었다. "지구야, 어지럽다. 멈춰다오"를 외치던 청년 시인에서부터 "인생은 짧고 X은 길다"던 위트까지. 나라고 예외였을까. 가끔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도', '옳소'라고 맞장구치던 댓글을 적었던 것 같다. 낙서로 얼룩진 '비언소'는 카타르시스가 넘치던 이름 그대로 '해우소'이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 남아들이 생애 첫 포르노를 접한 곳도 아마 화장실이었을 것이다. 플레이보이 잡지조차 변변히 없던 시절 누구나 벽면에 그려진 (W X Y)를 통해 처음 여체를 떠올리고, 이보다 훨씬 노골적인 장면도 마주했다. 요즘 말하는 야설도 이 곳에서 태동했다. 대략 '옆집 순이..'로 시작되던 글들은 가장 절정부분에서 끝나기 일쑤여서 이어진 후속편을 마저 보기위해 같은 곳을 찾던 기억도 난다. 경험중 하나는 2편은 몇 번째 칸이라고 적어 상중하 전편을 보기위해 3곳을 옮겨다닌 적도 있다.
그중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까발리기'였다. 싫어하던 선생님에 대한 비방은 공감할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누가 누구와 XX했다'식의 글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이 모든 것은 화장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이 보장하는 은밀함과 익명성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순기능은 창작열에 불타는 자유로운 표현이고, 역기능은 확인이 필요없는 무책임성이다.
역기능의 한 단면은 장르를 달리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잘 드러나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참혹한 복수극의 전말. 소문의 당사자인 여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런 사실은 커녕 자신이 한 말조차 기억을 못하는 주인공. '아무 생각도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을 수 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또다른 댓글 논란이 일었다. 미 대선전에서 돌풍의 주역이된 새라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후보가 당사자이다. 알라스카주 주지사인 그는 워싱턴 이너서클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정치신인이었다.
러닝메이트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사람들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페일린에 관한 정보는 약력과 현 직책 정도가 전부였다. 그때 위키피디아 인물란에 한 유저가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저돌적인 경기력으로 팀동료사이에 '바라쿠다'로 불렸다".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무스 사냥에 나섰다"는 댓글들이 하나씩 더해졌다. 후보 지명이 가까워 오자 주지사로서 펼쳤던 정책적 결단 등 '정치적' 내용들도 곁들여졌다. 페일린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고민하던 미 언론들은 이를 여과없이 기사화했고, 그의 이미지는 '강인하고 당찬 미국의 대표 워킹맘'으로 점차 굳어졌다.
이후 정책, 경력 등 일부가 과장내지 조작 논란을 빚은 것에 비춰 인터넷 댓글이 이른바 '페일린 효과'에 일조했음은 분명하다. 이를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당시 유저아이디 '영 트리그'가 올린 댓글이 20여개에 달한다고 말했다. 트리그는 공교롭게도 다운증후군을 앓고있는 페일린의 막내아들 이름이다. 미국인들이 댓글에 놀아났다고 아는 순간 '페일린 거품'도 깨졌다.

화장실 낙서는 이제 보기 힘들다. 요즘 화장실이 깨끗해진 것도 낙서가 사라진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터넷 공간도 깨끗해질 필요는 있다. 단지 순기능마저 저해하는 교각살우의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이자리를 빌어 풋풋하던 1992년 저축왕에 오른 최진실을 인터뷰했던 기자이자 또 한사람의 팬으로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억척 또순이로 소문난 그에게 '사채 소문'은 너무 터무니없는 큰 굴레였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노동교화형은 커녕…'신유빈과 셀카' 북한 탁구 선수들 '깜짝근황'
  2. 2 "바닥엔 바퀴벌레 수천마리…죽은 개들 쏟아져" 가정집서 무슨 일이
  3. 3 '황재균과 이혼설' 지연, 결혼반지 뺐다…3개월 만에 유튜브 복귀
  4. 4 "당신 아내랑 불륜"…4년치 증거 넘긴 상간남, 왜?
  5. 5 "밖에 싸움 났어요, 신고 좀"…편의점 알바생들 당한 이 수법[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