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금융위기, 극복의 묘수는 있다.

민주영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수석연구원 | 2008.09.25 12:00

[머니위크]민주영 투자학

# 장면 1
1637년 2월3일 튤립시장이 붕괴했다. 튤립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를렘에는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매매는 이뤄지지 않았고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전문적인 꽃상인들은 채권 투기꾼들에게 보유 어음을 넘겨 일부나마 회수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튤립시장의 불안은 1년 뒤인 1638년 5월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가격의 3.5%만을 지급하는 것으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하도록 명령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1000길더를 받기로 하고 튤립을 팔았던 사람은 35길더만을 받을 수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자 튤립뿌리 수집가들이 다시 시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아주 헐값에 튤립뿌리를 사들였다. 그리고 2~3년이 지나자 황제튤립의 값은 투기 발생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하지만 가난한 서민들이 한몫보기 위해 투기를 벌였던 낮은 등급 튤립 값은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장면 2
투기열풍이 불 때 은행들은 대출을 일삼았고 상인들이 상품 매점매석을 위해 발행한 어음도 마구 할인해주었다. 또 터무니없이 고평가된 주식과 채권을 담보로 대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영란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의 규모가 1900만 파운드를 넘어섰지만 금 보유량은 400만 파운드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악재가 전해졌다.

위기를 의식한 영란은행은 시중은행 베어링스와 로스차일드의 재할인 요구를 거부하는 등 통화긴축에 나섰다. 영란은행의 긴축정책은 당시 영국 금융시스템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1825년 12월 런던은 광란에 휩싸였다. 이달 초에는 폴앤코 런던은행이 도산했고 요크셔 지역의 주요 은행인 웬트워스가 문을 닫자 광란은 극을 달했다. 12월14일 폴앤코가 예금 지급 불능사태에 빠지자 이 은행과 거래했던 50개의 군소 은행마저 파산했다.

#장면 3
1920년 말 미국 할부채권규모는 60억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현금 판매액의 12.5%를 초과하는 것이었다. 이는 현재 이뤄지는 소비를 미래의 수익으로 결제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눈앞의 만족을 위해 미래를 과감하게 소비한 셈이다. 그 미래가 도래했을 때 자신들의 주머니가 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할부구매 시스템은 새시대의 경제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주식시장의 마진론도 1920년대 개인채무를 늘리는 요인이 되었다. 주가가 오를 때 투자자들은 마진론을 조달해 투자함으로써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929년 10월까지 브로커들과 은행이 투자자들에게 빌려준 돈의 규모는 약 160억달러였다. 이는 당시 미국 증시 시가총액의 18%에 이르는 것이었다.

#장면 4
1980년대 말 눈부신 성장을 거둔 저축대부조합(S&L) 뒤에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손실이 쌓여 있었다. 실버라도 대부조합을 구제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들인 돈만도 10억 달러가 넘을 정도였다. 700개가 넘는 대부조합들이 불법 투자로 무너졌고 미국민들은 2000억달러에 달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미국 투자자문사인 GMO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하고 있는 에드워드 챈슬러의 역작 <금융투기의 역사>(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1년)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에드워드 챈슬러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버블 분석의 대가로 통하는 데 요즘과 같은 금융위기에 그의 책은 많은 아이디어를 준다.


우선 '장면1'은 저 유명한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가 붕괴하기 시작하던 상황이다. '장면2'는 영국에 불어 닥쳤던 1820년대 남미 채권과 금광 등 이머징 마켓에 대한 투기가 무너지던 시기였다. 재미있는 것은 19세기 상당기간 동안 영국투자자들에게 남미뿐만 아니라 미국도 이머징 마켓이었다. 영국투자자들은 이후 미국 채권과 철도회사에도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고 적잖은 손해를 보기도 했다.

'장면3'은 1929년 미국이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 들기 전에 나타났던 차입투기의 현상을 묘사했다. 1920년대 미국 증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빚을 내 주식투기를 벌이는 차입투기의 일반화였다. 끝으로 '장면4'는 미국의 저축대부조합 연쇄 파산사태 당시의 이야기다. 1980년대 초반 미국 대부조합은 고금리로 대출을 해주는 사업을 통해 돈을 크게 벌었다. 하지만 이후 고수익을 노린 상업용 부동산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렸다가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자금회수를 하지 못한 대부업체들이 대거 파산하게 됐다.

다소 장황하게 책슬러의 책을 인용해 금융위기의 역사를 나열한 이유는 전반적으로 보면 연도와 투자대상에만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장면들을 지금 상황과 대입해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역사는 반복돼 왔다. 300여년 전에 벌어졌던 '황당하고 어리석었던'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는 것이 바로 금융시장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치가 부풀려 거래되면서 끝없는 탐욕으로 이어지다 결국 버블은 터진다. 미래에도 계속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빚을 져 투기에 뛰어들면서 버블은 더욱 크게 부풀고 그 피해 역시 확대됐다.

금융저널리스트이면서 역사가였던 제임스 그랜트는 "과학과 기술은 크게 진보했지만 금융은 반복된다"고 말했다. 흔히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투기의 성격도 변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였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저서 <1929 대폭락>(The Great Crash 1929)은 1954년 첫 선을 보인 이후 반세기가 넘게 투자자들에게 각광을 받아왔다. 그는 "그만 절판하고 책방에서도 거둬들이려고 할 때면 매번 다시 거품 경제 등 투기사건이 발생하곤 했다"며 주식투기, 증시 붕괴 등 본질적으로 같거나 비슷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발생해 온 것이 결국 책의 생명력이 됐다고 말했다.

최근 리먼 브러더스, 메릴린치 등 세계적인 금융회사들이 무너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극심한 공포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위기의 끝이 보이지 않다 보니 적지 않은 투자자들이 공포에 휩싸여 펀드를 내던지고 시장에서 도망쳐 나온다.

금융위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투기와 버블은 시장의 기본적인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출발한 자본주의 체제는 결국 투기와 버블, 폭락과 침체의 과정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부는 다수의 손에서 소수의 호주머니로 이동하곤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극심한 고통이 뒤따르긴 했지만 어떤 위기도 극복돼 왔다.

"영어에서 가장 비싼 네 단어는 '이번에 달라(This Tim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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