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6억, 8개 펀드에 거치식으로..분산 맞아?

머니위크 황숙혜 기자 | 2008.09.04 12:31
지난해 여름, 17년 넘게 다닌 직장에 사표를 던진 안분산 씨. 첫 직장에 입사한 후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기나긴 세월을 몸담은 데다 명예퇴직을 신청한 터라 퇴직금으로 받은 돈이 적지 않았다. 기존의 퇴직금에 명예퇴직금까지 총 6억원에 가까운 뭉치돈이 한꺼번에 들어온 것.

지난해 가을, 목돈을 어떻게 굴릴 것인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안분산 씨는 17년 이상 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받은 돈을 모두 들고 외국계 C은행을 찾았다.

은행 영업점의 직원과 한 시간 가량 상담을 받은 그는 총 8개 펀드에 뭉치돈을 나누어 담았다. 국내 주식형펀드를 포함해 중국펀드와 원자재펀드, 브릭스펀드 등 당시 뜨거운 인기를 끌던 펀드를 골고루 선택했다.

8개 펀드는 모두 거치식으로 가입했다. 들고 있던 목돈을 어딘가에 빨리 투자해야 할 것 같은 조급증과 은행 직원의 권유가 상승 작용을 한 결과였다.

퇴직금을 펀드에 나눠 담은 후 한동안 국내외 증시는 오름세를 보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1만선을 향해 고공행진을 펼칠 것만 같았고 이 여세를 몰아 브릭스와 원자재 펀드 역시 고수익을 안겨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적지 않은 자금을 '몰빵'이 아니라 분산해 포트폴리오를 과학적으로 설계했다는 데 강한 자부심을 느꼈다.

대학원 졸업 이후 청춘을 바쳐 일한 대가로 이제 더 달콤한 과실을 얻게 될 것이라 믿었던 안분산 씨의 장밋빛 희망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미국의 신용위기가 국내외 증시를 끌어내렸고, 악재에도 탄탄하게 버티는 듯 했던 브릭스와 원자재 펀드도 최근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

손절매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기 시작했을 때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 주가가 대폭 떨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6억원에 가까웠던 퇴직금이 4억원대 초반으로 줄어든 지금 안분산 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그가 무엇보다 비통해 하는 것은 분산투자를 했는데도 전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8개 펀드 중 몇 개 펀드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다른 펀드에서 수익이 발생해 전체 포트폴리오 수익률을 지켜 주리라 믿었는데 결과는 기대를 완전히 빗겨간 것.

과연 안분산 씨는 제대로 분산투자를 했던 것일까.

분산투자는 단순히 목돈을 여러 개의 펀드에 나누어 투자하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8개나 되는 펀드에 가입했으니 제대로 분산투자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 안분산 씨의 투자 결정에는 여러 가지로 헛점이 있었던 것이다.

◇ 위험자산에 '몰빵' = 안분산 씨는 6억원 가량의 자금을 8개 펀드에 나누어 투자했지만 실상 모든 자금을 주식형 펀드에 '올인'한 셈이다.

분산투자를 고려할 때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을 나누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수순이다. 기존에 보유중인 자산 현황과 자신의 투자 성향, 자금의 목적 등을 고려해 원금이 보장되는 자산으로 안전하게 굴려야 할 자금과 공격적으로 운용할 자금을 구분하는 것이 분산투자의 첫걸음이지만 안분산 씨는 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가입한 펀드는 투자자금을 100%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채권도 편입하지만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각 투자 자금의 목적까지 고려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100-나이'의 원칙에 맞게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을 안분해야 한다.

◇ 상관관계 고려 안한 분산 = 안분산 씨가 투자한 펀드는 위험자산 내에서도 자산간 상관관계가 높다. 서로 다른 펀드인 것 같지만 실상 주가 움직임이 서로 깊게 맞물린 상품이 대부분인 것.

그가 투자한 펀드는 주로 중국을 포함한 이머징마켓 및 원자재 가격 움직임에 높은 영향을 받는 상품이다. 중국펀드와 브릭스펀드는 투자 지역이 일부 겹치고 브릭스 지역의 주가 등락은 국제 원자재 가격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원자재 펀드와 상관관계가 높다. 엄밀한 의미에서 제대로 된 분산이라고 보기 힘들다.

주식형 펀드에만 가입하더라도 지역간 상관관계를 충분히 따질 때 분산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 안분산 씨와 같이 목돈을 투자할 때는 주식 이외에 채권과 부동산, 실물 등 다양한 자산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 일시에 '베팅' 시간 분산 '전무' = 분산해야 할 대상에는 시간도 포함된다. 천편일률적으로 단순히 묻어두는 장기투자만 능사가 아니라 시장 상황에 따라 호흡을 길게 할 때와 짧게 할 때를 구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투자 시점도 분산해야 한다. 특히 안분산 씨처럼 목돈을 투자할 때는 한꺼번에 모든 자금을 베팅하기 쉽지만 거치식보다 적립식을 선택해 시간을 분산하는 것이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유리하다.

안분산 씨는 모든 펀드를 거치식으로 투자했을 뿐 아니라 8개 펀드를 같은 날 동시에 가입해 시간에 대한 분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거치식이 아닌 적립식으로 가입했더라도 마이너스 수익률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코스트 애버리징' 효과로 손실폭을 줄일 수는 있었던 문제다. 또 조급증을 참지 못하고 모든 펀드를 일시에 가입할 것이 아니라 자산시장의 향방을 지켜본 후에 최종 투자판단을 내리는 여유를 가졌다면 투자 손실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 돈만 나누는 것은 의미 없어 = 결국 안분산 씨가 분산한 것은 투자자금 뿐이었던 셈이다. 즉 뭉치돈을 다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았을 뿐 그밖의 분산 요건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재무설계 전문가는 단순히 돈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분산투자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 투자교육 전문가는 "분산투자는 거액의 자금을 작은 덩어리로 쪼개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라며 "실제로 중국펀드와 친디아, 브릭스 펀드에 가입하고 분산투자했다고 말하는 투자자가 아직도 적지 않은데 여러 상품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분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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