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집'도 못 가는 백조

머니투데이 박희진 기자 | 2008.08.25 08:49

[2008 백수보고서-5]취업문 더 높은데 백조면 시집도 못가

"백조 시절요? 정말이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2006년 겨울. 서울 중위권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김지영씨(가명, 29)는 대학 졸업 후 작은 광고회사에서 시작된 4년간의 직장생활이 지긋지긋해졌다. 그 사이 회사를 두 번 옮기고 새 출발도 해봤지만 '그 물에 그 밥'인 회사 생활은 야근과 스트레스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고 무엇보다 비전이 없다는 생각이 가장 답답했다.

누구나 겪는 슬럼프라 생각하고 넘기려 했지만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을 압도하는 '무기력'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충전'과 '재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과감히 사표를 냈다. 콤플렉스였던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기로 하고 미국 연수를 결심했다. 업무상 영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모든 '여성들의 로망'인 뉴욕으로 날라 갈 때만 해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인라인을 타고 달리며 맛본 한 겨울 찬바람은 청량감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라는 가슴 벅참은 석 달이 채 가지 않았다. 맨해튼 레스토랑에서의 여유로운 브런치와 화려한 쇼윈도는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갖고 온 돈은 점점 바닥이 나고 멀쩡히 다니는 회사를 관두고 미국에 온 상황에 부모님에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 '생활고'가 심해지면서 뉴욕 생활에 대한 '장밋빛' 기대감은 사그라졌다. 그래도 '자유'가 있었다.

진짜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맞닥뜨린 높디높은 '재취업'의 벽이었다. 귀국 후
열군데 이상 이력서를 냈지만 회신조차 없었다. 상심이 너무 커 다시 이력서를 낼 엄두가 안 났다. 연수까지 다녀왔는데 아무 회사나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자신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게 싫어 구직활동을 접어 버렸다.

본격적인 '백조'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엔 기본적인 끼니는 집에서 해결하고 옷은 언니에게 신세지고 일하는 친구들 만나 밥 얻어먹고 하니 당장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 마음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끔 힘내라며 용기를 북돋아줬던 언니가 무심코 "너 뭐야, 기생충이야"라는 말을 던져 마음에 상처를 줬다.

"일을 안 하고 있으니 사람이 처지고 사람들 만나기도 점점 싫어지고. 무기력 그 자체였어요. 너무 힘든 나날이었죠. "


자신감도 점점 잃어갔다. "TV 보면서 여자 회사원들 아침에 커피 하나 들고 사무실 들어가는 거 보면 아, 나도 다시 저 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언니 몰래 부모님께 용돈도 받았지만 얇아진 지갑만큼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냈다.
수입은 없는데 매달 20만원씩 넣는 연금 저축 때문에 결국 소액이나마 은행대출도 받았다.

친척 어른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시집이나 가란다. 요즘은 '백조'면 시집도 못 간다. 취직 안 되는 백조는 취집(시집+취업)도 못 하는 시국이다.

"어른들이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라고 하는데 요즘 남자들이 얼마나 약았는데 일 안하는 여자랑 누가 만나려고나 하겠어요. 집에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혹할 만큼 어린 것도, 대단한 미인도 아니고."

특히 일찌감치 '취집'에 나서는 '똑똑한' 어린 여자들이 많아지는 추세라 김씨의 설자리는 더욱 좁아지기 마련.

"직업란에 '신부수업' 적는 건 아무나 하나요. 부잣집 딸내미나 가능하죠. 평범한 저는 '취직' 만이 살 길이었어요."

실제로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5월말 기준 대학생·대학원생 여성 회원은 총 288명으로 51명에 불과했던 전년에 비해 6배로 늘었다. 특히 상류층에서의 '취집' '조혼'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8개월간의 서럽던 백조 생활 끝에 다행히 김씨는 지난 5월 직장을 구했다. 꽤 좋은 조건의 회사라 합격 메일을 받았을 때 김씨는 날아갈 듯 기뻤다. 그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원하는 곳에 재취업한 김씨는 그나마 나은 사례다. 경기가 악화되면서 백조들이 급증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고용 시장에서 불리한데 경기 악화에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구직단념자 가운데 남성은 전년동기대비 1100명 감소한 6만5000명으로 지난해 3월 이후 감소세지만 여성은 5만5000명으로 1만7200명 늘어 5개월 연속 증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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