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되살아나는 냉전의 악령

머니투데이 윤석민 국제경제 부장 | 2008.08.20 06:00
일전 러시아 언론인에게 그루지야인에 대해 물었더니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산악인'이라고 답했다. 쉽사리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의 변방인이라는 뜻이리라.
러시아대륙에서 크림반도로 통하는 길목의 그루지야는 모반의 땅이다. 지정학적 위치상 기독교와 이교도인 이슬람, 아시아계 유목민족 등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거칠고 척박한 풍토를 만들어 냈다.

이 땅이 다시 화염을 내뿜으며 전세계적 관심의 대상지가 됐다. 민족 문제로 불거진 러시아와 그루지야간의 갈등이 분쟁의 도화선이 됐지만 실상은 더 위태롭다. 범 슬라브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등 서방세계의 상충하는 이해가 표출된 때문이다.

해양 대(對) 대륙 세력의 충돌이라는 고전적 대치관계로 인해 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종말을 고한 냉전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고조된다. 실제로 그루지야 분쟁 한 켠에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 인구 460여만명에 불과한 그루지야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러시아의 극렬 반발이 뻔한데도 불구, 남오세티아 문제에 개입한 점도 미국이라는 든든한 뒷 배경이 있는 탓이리라.

사카슈빌리의 대미 접근정책은 급진적일 정도이다. 2004년 전 셰바르드나제 정권의 부정선거를 빌미로 정권을 장악한 사카슈빌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모색 등 적극적인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다. 반면 시한까지 정하며 러시아군의 철군을 요구하기도 했다.

러시아로서는 등에 비수를 맞은 격이다. 그루지야와의 뿌리 깊은 애증의 역사가 되살아난 순간이기도 하다. 그 땅에서 태어난 스탈린도 이러한 오랜 반감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한 편린이다. 강철이라는 이름값 그대로 스탈린은 레닌과 온 러시아인민이 힘을 합쳐 이룬 '아름다운 사회주의 조국' 체제를 완성은 시켰지만 공포라는 두 글자를 깊이 각인시킨 장본인이다.

또 한 명은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이다. 그루지야 제 1서기 출신인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함께 페레스트로이카의 추진자이자 대외 창구로 서방세계에 명성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냉전은 종식됐지만 계획 경제의 비참한 말로를 경험한 러시아인들에게는 '소비에트의 부와 영광'을 한꺼번에 날린 원성의 대상중 한 명이 됐다.

그리고 이제 그루지야인 사카슈빌리가 또 다시 모반을 꾀했다. 러시아의 응징은 단호했다. 자국민 보호를 내세워 즉각적으로 그루지야로 밀고 들어갔다. 당초부터 전력면에서는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다.


상징적으로 스탈린의 고향 고리시를 바로 장악한 러시아군은 전리품을 수북히 쌓아놓고 언론에 공개했다. 그루지야군을 무장해제하며 빼앗은 군수품들은 방탄헬멧, M60 기관총 등 우리 눈에 친숙한 미군 장비 일색이다. 러시아가 대외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미국의 개입'이라는 사실인 듯 싶다. 아직 나토에 편입도 안된 그루지야군이지만 이미 이들의 무기체계는 미국에 익숙한 동맹국과 다름 없다. 그루지야의 영어식 발음이 미국의 주이름인 '조지아'와 같은 점도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는 더 나아가 미국의 음모론도 제기했다. 공화당 집권연장을 노리는 부시 행정부의 위기 조장용 시나리오라는 주장이다. 특히 네오콘 딕 체니 부통령의 실명까지 들먹이며 그가 사카슈빌리를 획책해 전쟁을 유도했다고 덧붙였다. 그루지야사태는 '전쟁 영웅'인 존 매케인 미 공화당 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폴란드 등 구 동구권의 미사일방어체계 편입, 코소보 독립허용등으로 러시아를 자극시켜왔다. 반면 러시아는 이를 빌미삼아 그루지야내 자치구인 남오세티아의 러시아 민족에게 시민권격인 여권을 발부하는 등 갈등의 불씨를 심었다.

때문에 러시아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맘에 안든다고 탱크를 앞세워 독립국을 침범한 예는 과거 헝가리나 체코 등 위성국가의 '봄'을 짓밟던 행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폭압적 버릇이다. 그리고 음모론 또한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을 어쩜 그리 빼닮았는지.

결국 역사는 돌고 도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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