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향기에 스민 행복

전두환 신한카드 부사장 | 2008.08.01 15:45

[머니위크]전두환의 '나의 와인 스토리'

조선 세조 때에 지어졌다는 운길산 수종사에 오르면 양수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필자는 서울 송파구에 사는 동안 아침 일찍이 수종사를 가끔 들리곤 했다.

탁 트인 두물머리와 겹겹이 보이는 산 능선들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앞쪽의 강은 북한강이요, 뒤편은 남한강이다. 어느 날 오래간만에 수종사에 오르니 스님과 바둑을 두던 자리 옆에 짓고 있던 건물이 완성되었다. 다실 삼정헌(三鼎軒), 선(禪), 시(詩), 차(茶)가 하나로 통하는 방이다.

다실의 여자 방장에게 찻물포트와 차를 얻어 와 나지막한 탁자를 마주하고 앉는다. 차를 우려내고 천천히 차향을 음미한다. 집중하지 않으면 옆쪽 커다란 통 창문에 비치는 두물머리 경치에 혼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녹차의 그윽한 암향(暗香)은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향내는 더러움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한다 하여 제사나 종교의식에서는 거의 향을 피운다. 다실의 분위기는 엄격해서 벽에 기대고 앉거나 자세가 많이 흐트러지면 여지없이 방장의 일갈이 떨어졌다.

와인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부문이 와인의 향기이다. 와인을 오래 접한 애호가들이 이야기하는 복잡하고 생소한 향들이 그들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정확한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향을 느껴야 한다. 맛을 보기 싫은 쓴 약은 코를 막고 먹지 않는가. 아울러 미각과 달리 후각은 정신적인 차원의 감각이다. 한 잔의 차나 와인을 마시면서 향을 통해 추억속의 멀고 긴 실타래를 풀어낸다.

와인 잔에 코를 깊숙이 대고 숨을 들이 쉬면 향이 비강을 통해 후각돌기에 이르고 이때 우리는 향기를 느낀다. 향기란 본래 꽃이나 향에서 나는 좋은 냄새다. 하지만 와인 향의 경우 흙이나 가죽냄새 등 평소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냄새도 귀하게 여긴다.

와인을 한모금 머금으면 우리의 입속은 또 하나의 훌륭한 와인 잔이다. 입속에서 데워진 공기는 와인의 향이 잘 발산되도록 돕는다. 숨을 내쉬는 과정에서 그 향은 인후부, 후각돌기를 거쳐 맛으로 인식된다. 와인을 삼킨 후 입, 코와 목에 남은 와인의 향과 맛을 여운(finish)이라 한다. 여운의 짧고 김에 따라 와인의 질을 평가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도 훈련 정도에 따라 약 1000개의 향을 구분할 수 있는데 와인에는 약 200여개의 향 물질이 들어있다고 한다. 후각을 개발하기 위해 나는 르네 뒤 뱅(Le Nez Du Vin) 향키트를 가지고 있다. 이 키트는 과일향, 꽃향, 채소향, 그을린향 등의 54가지의 아로마 리스트로 돼 있다.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다성(茶聖)이라 불리운 초의선사는 수종사의 샘물로 차를 즐기며 교류하였다고 전해진다. 다산은 조선의 실학을 완성한 학자로 긴 유배생활 중에서도 주옥같은 저서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까운 능내면 와부리에서 태어났고 만년을 보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선각자들이 이곳 두물머리에서 어떤 담론을 나누었을까 궁금하다. 추사와 초의는 가까운 친구로 지내며 12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한 추사를 늘 안타까워하였다.

한때 필자는 후각의 내공을 키우고자 이른 새벽 나무 향과 차향만이 가득한 삼정헌에 숨어들어 공복의 깨끗한 몸으로 향 맡기 수련을 몰래 하곤 했다. 하지만 요즈음 지나치게 와인의 향에 빠졌던 때를 후회한다. 왜 와인을 마실까?

필자는 거실에 추사의 글 한 점을 걸고 바라본다. 물론 복사본이지만 추사의 글씨는 늘 편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茗禪(명선 -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 다산은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부기하고 있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 왔는데 중국 최고의 차에 못지않다. 이 글을 써 보답한다."

와인 한잔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위의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독자들이여 내게 어떤 향을 느끼느냐고 묻지 말지어다. 현인들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한잔의 와인에 우울해진 영혼이 명랑해지고 즐거워지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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